요한복음 19:16~30

다 이루었다(It is finished, 테테레스타이)

예수께서 신포도주를 받으신 후에 이르시되 다 이루었다 하시고 머리를 숙이니 영혼이 떠나가시니라.”(19:30)

 

 

식물학자 알프레드 러셀 윌리스 박사가 연구실에서, 고치에서 빠져나오려고 애쓰는 나비의 모습을 관찰하고 있었습니다. 바늘귀같이 작은 구멍을 뚫고 고치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꼬박 한나절을 애쓰고 있었습니다. 나비가 고치에서 나오느냐 마느냐는 생사가 걸린 문제였습니다.

바늘귀같이 작은 구멍을 뚫고 나온 나비는 활기찬 날갯짓을 하며 세상으로 날아갔습니다. 그중에 다른 나비들과 달리 고치를 쉽게 뚫지 못하는 나비가 있었습니다. 윌리스는 이를 안쓰럽게 여긴 나머지 나비가 쉽게 빠져나올 수 있도록 고치의 옆을 칼로 살짝 그어주었습니다.

나비는 박사의 도움을 받고 고치에서 나왔습니다. 혼자 힘으로 고치를 뚫고 나온 나비와는 달리 무늬나 빛깔이 곱지 않고 날갯짓에 힘이 없었습니다. 그렇게 몇 번의 날갯짓을 시도한 나비는 결국 죽고 말았습니다. 윌리스 박사는 고통과 인내의 관문을 통과하지 않고는 아름다운 나비가 될 수 없음을 깨달았습니다.

나비뿐만 아니라 모든 사물의 이치가 다 이러합니다. 뜨거운 불을 통과해야 순금이 나옵니다. 우리의 믿음도 똑같습니다. 박해를 받으므로 불순물이 제거되고 순금보다 더 정결한 믿음의 사람이 됩니다. 사도 바울은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박해를 받으리라.”(딤후 3:12)라고 했습니다.

욥은 애매하게 고난을 많이 받았습니다. 그는 많은 고난으로 인생의 불순물과 찌꺼기가 제거되고 하나님만 바라보는 순전한 사람이 되었습니다(23:10). 욥은 시련이 끝난 후에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42:5)라고 고백했습니다. 시련과 고난을 받아 순전한 마음이 되니 하나님을 뵙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시는 사건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시는 모습은 예수님의 생애에 가장 고통스러운 순간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십자가는 영광의 십자가, 대속의 십자가, 구속 역사 완성의 십자가입니다. 그래서 왕관이나 명예로운 훈장에도 십자가가 새겨져 있습니다. 유럽 국가 중에는 국기에도 십자가가 새겨져 있습니다. 고난 주간에 예수님의 구원역사의 절정인 십자가를 묵상하고 은혜를 나누기를 기도합니다.

1.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19:16~18)

로마 총독 빌라도는 예수님을 고발한 대제사장들과 무리에게 십자가에 못 박도록 내주었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고 해골(히브리말로 골고다)을 올라가셨습니다. 예수님의 어깨에 지워진 십자가의 무게는 약 80Kg입니다. 그러니 얼마나 무겁고 고통스러웠겠습니까?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에 오르시기 전에 채찍당했습니다. 로마법에 의하면 로마인은 몽둥이 40, 이방인은 채찍 40대 유대인에게는 120대의 채찍이 정해졌습니다. 채찍의 끝에는 납덩이가 달려있어 한 번 맞을 때마다 피가 튀고 살점이 뚝뚝 떨어져 나갔습니다.

예수님은 온몸에 피멍이 든 채 쓰러지셨습니다. 군병들은 채찍질하고 나서 예수님의 머리에 가시 면류관을 푹 씌웠습니다. 날카로운 가시가 머리에 박히자 피가 흐르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군병들은 예수님께 자색 옷을 입히고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할지어다.”하며 손바닥으로 얼굴을 때리며 조롱했습니다.

경배받아야 할 만왕의 왕 예수님께서 조롱과 멸시와 침 뱉음을 받으셨습니다. 지치고 상하신 상태에서 십자가를 지고 오르시는 골고다 언덕길은 너무 힘들고 고통스러웠습니다. 이 언덕길은 고난의 길, 멸시와 저주의 길입니다. 복음성가 저자는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주님 가신 길 십자가의 길 외롭고 무거웠던 길, 골고다의 거친 언덕길, 지치신 주님의 음성 오 나의 주님 용서하소서. 죄인 위해 고난받으셨네. 이 세상에 생명 주시길 그렇게도 원하셨던 길

예수님은 기진맥진하여 더 이상 십자가를 지실 수 없었습니다. 이에 군병들은 구경하던 구레네 사람 시몬에게 대신 십자가를 지게 했습니다. 예수님은 해골에 도착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셨습니다. 예수님의 양 쪽에는 두 죄수가 십자가에 못 박혔습니다(19:18).

십자가형은 인류가 고안해 낸 가장 잔인한 형벌입니다. 단두대형이나 교수형과 총살형의 고통은 순간입니다. 그러나 십자가형은 2,3일 동안 나무에 매달려 물과 피를 다 쏟는 무서운 고통을 맛보다가 배고픔과 갈증으로 죽어갑니다. 못박을 때도 신경이 가장 많이 모인 손목과 발목에 못을 박습니다. 몸을 움직일 때마다 살이 찢어지고 뼈가 상합니다. 움직이는 그 자체가 고통입니다. 고통이 얼마나 극심한지 죽기까지 천 번 이상 까무러친다고 합니다.

사형수에게 베푸는 유일한 자비는 망치로 뼈를 꺾어 조금이라도 빨리 죽게 해주는 것입니다. 무자비한 군병들은 망치로 예수님의 손과 발에 굵은 대못을 박았습니다. 못은 예수님의 살을 뚫고 뼈를 으스러뜨리며 신경을 파괴하고 나무에 박혔습니다. 이때 붉은 피가 솟구쳤습니다. 예수님이 세 개의 못에 매달리자 온 몸이 뒤틀리며 경련을 일으켰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당한 고통을 다 이해할 수 없고 알 수 없습니다. 시편 기자는 예수님의 고통을 나는 물같이 쏟아졌으며 내 모든 뼈는 어그러졌으며 내 마음은 밀랍 같아서 내 속에서 녹았으며 내 힘이 말라 질그릇 조각 같고 내 혀가 입천장에 붙었나이다 주께서 또 나를 죽음의 진토 속에 두셨나이다.”(22:14~15)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너무 힘들고 고통스러워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고 부르짖었습니다. 아무 죄 없으신 예수님께서 왜 이런 고통을 당하셔야 합니까?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우리는 다 양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53:4~6)

예수님은 나의 죄로 채찍에 맞고 물과 피를 쏟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쓸모 없는 나 한 사람을 구원하시기 위해 고난 당하시고 채찍에 맞으셨습니다. 예수님은 나의 죄로 고통스러운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예수님은 쓸모 없는 나 한 사람을 위해 상하고 찢기셨습니다. 예수님은 나의 죄로 십자가에 달려 슬픔의 주, 고난의 주가 되셨습니다. 죄는 지독하여 반드시 그 대가를 요구합니다. 죄의 대가는 피, 생명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내 모든 죄의 대가를 지불하셨습니다.

우리의 내면에는 그 누구도 해결해 줄 수 없는 마음의 상처가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허물과 죄악이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많은 질병이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많은 슬픔이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피해의식과 가해의식이 있습니다. 죄는 마음의 평화를 앗아갑니다. 죄는 우리에게 공허, 불안, 두려움과 미움을 가져다주고 우리를 무기력하게 하고 고통스럽게 합니다.

지난주 50년 전에 같이 신앙생활을 했던 형제에게서 연락이 왔습니다. 그는 대전의 국책 연구소에서 근무하다가 은퇴했고 결혼도 하고 자녀를 둔 가장입니다. 그런 그가 내면 한 곳에 아픈 상처가 있었습니다. 그 상처는 50년 전에 사랑하던 여인과 원치 않게 헤어져야 했던 아픔이었습니다. 그는 이 상처를 치료하기 위해 천주교에 귀의했지만, 아직도 그 상처가 아물지 않았습니다. 누가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습니까?

예수님은 십자가상의 일곱 마디를 남기셨습니다. 이를 일컬어 가상칠언이라고 합니다. 그 첫 말씀이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23:34)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우리의 죄를 용서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죄를 가장 미워하십니다. 죄의 기원은 최초의 사람, 아담 한 사람이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먹은 데서 시작합니다. 그러면 아담의 죄가 나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이를 대표 원리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는 1910년부터 1945년까지 35년간 일제 지배를 받았습니다. 우리는 당시 태어나지도 않았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식민지 백성이었다는 멍에가 씌워져 있습니다.

2000년 전에 십자가에 돌아가신 예수님의 용서 기도가 지금 나에게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이를 대신 원리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아무 공로 없이 1945년에 해방되어 대한민국 국민이 되었습니다. 이는 우리를 대신하여 독립투쟁을 한 선열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희생으로 우리는 자유 대한에서 사는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예수님은 인류를 대신하여 십자가에서 용서하셨습니다. 이로써 우리는 하나님과 나 사이에 막혔던 벽이 허물어져 하나님께 가까이 나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과 원수 되었던 관계가 화목하게 되었습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도 화목하게 되었습니다.

십자가에 흘린 피로 나의 죄를 정결하게 하시고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 주신 주님! 탕자 같이 헤매고 방황할 때 나를 받아 주시고, 용납해 주시고, 자녀로 삼아 주신 주님! 이 시간에 모든 상처를 씻어주소서! 치료해 주시옵소서! 새롭게 하여 주소서! 성령으로 자유하게 하옵소서! 용서의 참 기쁨과 즐거움을 주옵소서! 제가 주님께 많은 사랑의 빚을 지었사오니, 용서하지 못한 사람이 있다면 사랑과 용서하는 마음을 주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2. 다 이루었다(19:19~30)

빌라도는 예수님의 머리 위에 나사렛 예수 유대인의 왕이라고 히브리말과 로마와 헬라어로 기록했습니다. 빌라도는 비록 유대인들의 압력에 굴복하여 예수님께 사형 선고를 내렸지만 만왕의 왕으로 인정하였습니다. 빌라도가 가이사에게 보낸 보고서를 보면 진실로 이 사람은 하나님의 아들이었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고통받고 있을 때, 군병들은 그 밑에서 예수님의 겉옷과 속옷을 취하고자 제비를 뽑고 있었습니다(19:23~24).

그들은 가까운 곳에서 십자가의 은총으로 누구보다도 먼저 구원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런 그들이 몇 푼 안 되는 물질에 혈안이 되어 구원받지 못하는 자들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군병들이 이런 일을 하는 것도 성경에 기록된 말씀을 응하게 하려 함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밑에는 어머니와 이모와 글로바의 아내 마리아와 막달라 마리아가 있었습니다(19:25). 이들은 평소에 예수님을 사랑하고 뒤에서 복음역사를 헌신적으로 섬긴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들은 사랑하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박혀 고통하는 모습을 보며 울었습니다.

특히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는 아들이 십자가에서 죽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칼로 마음을 찌르는 고통을 맛보아야 했습니다(2:35). 예수님은 십자가의 극심한 고통 중에도 어머니의 장래를 생각하고 영적인 아들인 요한에게 어머니를 부탁하며 위로해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마리아의 슬픔을 담당해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모든 일이 다 이룬 줄 아셨습니다. 그러나 성경 말씀 한마디를 응하게 하시기 위해 내가 목마르다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모든 말씀을 이루신 후, 십자가에서 최후의 한마디를 남기셨습니다.

예수께서 신포도주를 받으신 후에 이르시되 다 이루었다 하시고 머리를 숙이니 영혼이 떠나가시니라.”(19:30)

죽으면서 하는 한 마디는 그 사람의 삶의 결산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나폴레옹의 한 마디는 나는 불행했다! 프랑스, 군대, 죠세핀이었습니다. 베토벤의 한 마디는 친구여 박수를, 비극은 끝났다!”이었습니다. 그의 인생은 한 마디로 비극이었습니다. 괴테는 나에게 빛을!” 하며 죽었습니다. 그의 인생은 한 마디로 어둡고 병든 인생이었습니다. 불신자였던 볼테르는 나는 하나님과 사람에게 버림을 받았소! 만일 6개월만 더 살게 해 준다면 내가 소유한 절반이라도 주겠소.”하며 눈을 감았습니다. 회의론자 홉스는 나는 이제 어둠 속으로 떨어져 들어가려 한다.”고 했습니다. 성철 스님은 내가 묻 선남 선녀를 속였으니 내 죄가 너무 크다.”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십자가 상에서 다 이루었다!”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의 뜻이 무엇입니까?

첫째, 구약성경에 기록된 예언의 말씀을 다 이루셨다.

하나님은 여러 선지자로 인류를 죄에서 구원할 메시아를 보내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이 메시아는 고난의 메시아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예언된 성경 말씀이 다 이루어졌습니다. 이로써 하나님의 신실하심이 입증되었습니다. 예수님은 바로 구약에 약속된 메시아입니다.

둘째,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를 다 이루셨다.

하나님은 사랑과 공의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거룩하셔서 죄와 함께하실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죄를 미워하지만, 사람을 사랑하시는 사랑의 하나님입니다. 사랑과 공의는 공존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마침내 사랑하는 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아 율법이 요구하는 죄의 대가를 치르심으로 의를 이루셨습니다(3:13). 동시에 예수님을 믿는 자마다 모든 죄를 용서하셨습니다. 이로써 하나님은 십자가에서 공의와 사랑을 충족하셨습니다.

셋째, 구속역사를 완성하셨다.

본래 인간은 율법을 행함으로 하나님과 바른 관계성을 맺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전적으로 부패하여 선을 행할 의지도 없고 행할 능력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합니다. 그래서 인간은 죄를 지을 때마다 양을 잡아 피를 흘리고 고기를 태워야 했습니다.

이는 말처럼 쉽지 않습니다. 피비린내와 고기 타는 냄새는 역겹기 그지없습니다. 비가 오는 날의 피비린내는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양이라고 다 제물이 될 수 없었습니다. 정한 기준에 합당한 것만이 제물이 될 수 있었습니다. 또한, 짐승의 피는 효력이 단회적이므로 연약하여 죄를 반복할 수밖에 없는 인간은 날마다 피비린내 나는 고통의 제사를 드리며 살아야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인간의 연약함을 아시고 완벽한 구원의 길을 열어놓으셨습니다. 그 구원의 길이 십자가입니다. 하나님은 흠 없으시고 깨끗하고 순결하신 예수님을 속죄양으로 삼으셔서 단번에 영원한 속죄를 이루시고 율법을 완성하셨습니다(9:12). 그러므로 우리가 죄를 용서받기 위해 해야 할 일이 더는 없습니다. 양을 잡을 필요가 없습니다. 율법과 행위가 개입될 필요가 없습니다. 고행과 수련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예수님께 있는 모습 그대로 나가면 됩니다. 구원은 우리의 의지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전적인 은총입니다. 우리는 다 이루신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의 보좌 앞에 나가면 됩니다. 그러면 미쁘시고 의로우신 예수님께서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십니다(요일 1:9).

십자가는 나의 죄가 얼마나 크고 흉측한가를 보여주는 사건이요 동시에 죄인 된 우리를 용서하신 하나님의 크고 놀라운 사랑을 보여주는 사건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대속의 십자가, 구원의 십자가입니다.

넷째, 십자가는 승리와 영광의 십자가이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영광과 승리의 십자가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가 영광과 승리의 십자가입니까? 이스라엘 백성은 메시아를 기다리고 기다렸습니다. 그들은 메시아가 오시면 모든 인생 문제를 해결해 주시라고 믿었습니다. 그들이 기다리고 기다리던 그 메시아가 십자가에서 구원을 완성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십자가는 단순한 사건이 아니라 구원이 완성되는 승리와 영광의 십자가입니다.

영국의 신약학자인 톰 라이트(Nicholas Thomas Wright)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다음과 같이 기술했습니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나라가 이 세상 나라에 승리를 거둔 순간이다. 십자가는 첫 사람 아담의 불순종 이후 굳게 잠겼던 거대한 옛 문이 활짝 열렸다. 폐쇄되었던 동산이 다시 열려 우리에게 기쁨을 주신 정도가 아니라, 하나님이 계획해 오셨던 장차 올 도성을 우리에게 공개하고 초대하여 그 문을 통과하여 들어와 그분과 함께 그 도시를 건설하자고 권하는 순간이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온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뜻이 최종적으로 성취되고, 구원 역사가 최종적으로 성취되는 순간입니다.

우리는 보통 예수님의 십자가를 대속의 십자가로만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은 내 죗값을 대속하는 것은 물론 하나님이 창조한 세계의 어제와 오늘과 내일의 운명이 바뀌는 우주적인 대전환의 사건입니다. 예수님은 이 엄청난 일을 십자가의 죽음으로 이루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메시아로서의 왕권과 대제사장, 선지자의 직임을 십자가 위에서 완성하시고 선포하셨습니다. 메시아란 기름 부음 받은 자란 뜻입니다. 왕이나 제사장, 선지자를 세울 때 기름을 부었습니다.

우리 또한 예수님을 믿고 세례를 받는 순간에 죄에 대해 죽고 의에 대해 살게 됩니다. 그 순간, 우리 크리스천은 산돌(the living Stone)이신 예수님을 중심으로 산돌(living stones), 왕같은 제사장으로 살게 됩니다(벧전 2:3~9). 또한 선지자적인 삶을 살게 됩니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는 어떤 삶을 살아야 합니까? 선지자의 삶을 사신 예수님을 배워 미래와 사회에 옳고 그름을 선포하며 선견적인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리고 제사장답게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무너진 관계, 인간과 인간 사에 깨진 관계에 다리를 놓아 가정과 직장과 세상에 관계를 회복하도록 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뿐만 아니라 진리의 왕처럼 사회에 공의를 추구하고 세워나가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왕 같은 제사장, 선지자는 각각 나누어진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나는 지금 어떤 삶을 살고 있습니까? 오늘 우리가 하나님의 능력, 하나님의 영광, 하나님의 사랑을 드러내는 길은 십자가의 길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은 나를 패배에 두심으로 구원의 길로 인도하십니다. 하나님은 나를 조롱당하게 함으로써 영화롭게 하시고, 무너뜨림으로써 세우시고, 죽음의 골짜기를 지나게 함으로써 생명을 살게 하십니다. 하나님은 나를 무너뜨림으로써 새롭게 세우십니다. 하나님은 가난하게 하심으로 부유하게 하십니다. 하나님은 많은 역경을 주심으로 순금보다 더 값진 믿음의 보화를 주십니다.

십자가는 영원한 효력이 있습니다. 만왕의 왕 예수님의 마지막 한 마디는 온 인류에게 영원한 효력이 있습니다. 그래서 이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한 구속의 완성은 지금도 유효하여 믿는 자마다 죄로부터 구원을 얻고 새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온전히 죽으시고 장사지낸 바 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을 보면서 아리마대 요셉과 니고데모의 마음에 변화가 생겼습니다. 십자가로 숨겨진 믿음을 드러냈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상에서 구원역사를 다 이루셨습니다. 이로써 우리는 죄로부터 온전히 구원받았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우리는 왕 같은 제사장, 선지자와 같은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승리의 십자가 영광과 구원의 십자가입니다. 고난 주간에 영광과 승리의 십자가가 주는 은혜를 깊이 묵상하고 감사하며 모든 삶에서 십자가의 승리와 영광이 나타나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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