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5:1~9

진정한 베데스다, 예수님

예수께서 그 누운 것을 보시고 병이 벌써 오래된 줄을 아시고 이르시되 네가 낫고자 하느냐.”(5:6)

공관복음(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에는 예수님께서 행하신 이적이 많이 나옵니다. 그러나 요한복음에는 7가지 이적만을 선별하여 기록했는데, 이를 표적이라고 했습니다. 표적은 그 사건 자체도 중요하지만, 그 사건 속에 영적인 깊은 뜻이 있습니다.

본문에 서른여덟 해 동안 베데스다 못만 쳐다보고 살아온 사람이 나옵니다. 히브리어로 베데스다는 자비의 집(house of mercy)이란 뜻입니다. 그런 그에게는 베데스다가 서른여덟 해 동안 자비의 집이 되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그가 한 번도 일등을 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는 베데스다에서 자비만 구하다가 서른여덟 해의 긴 세월이 지났습니다.

십 년이면 강산이 변한다고 합니다. 서른여덟 해라면 강산이 네 번이 변했습니다. 그는 푸르고 푸른 청년의 시기를 이 베데스다에서 보냈습니다. 그의 몸과 영혼은 피폐할 대로 피폐해졌습니다. 누가 이런 사람에게 소망을 둘 수 있겠습니까? 기쁘고 즐거운 명절에 누가 그를 거들떠보겠습니까? 베데스다 못은 패자 부활전이 없는 오직 일등만이 존재하는 자비가 없는 사회의 축소판입니다.

그러나 그에게 찾아가 위로하고, 그에게 소망을 심고, 그를 일으켜 세우신 한 분이 계셨습니다. 사람들은 그를 외면했지만, 외면하지 않고 찾아가신 분이 계셨습니다. 사람들이 그를 보며 수군댔지만, 그를 따뜻한 가슴으로 안아주신 분이 계셨습니다. 그분은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그에게 찾아가 보시고 네가 낫고자 하느냐?” “네 자리를 들고 일어나 걸어가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가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했을 때, 자리를 들고 일어나 걸어가는 새로운 삶이 시작되었습니다.

본문에서 우리는 자비가 없고 좌절과 절망을 가져다주는 베데스다를 바라보지 말고 낫고자 하는 소원을 심으시는 자비로운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누운 자리에서 일어나 걷는 재창조의 역사가 이루어지를 기도합니다.

1. 자비의 집에 누워있는 서른여덟 해 된 병자(5:1~5)

예수님은 유대의 명절이 되어 예루살렘에 올라가셨습니다. 유대의 3대 명절은 유월절, 장막절, 오순절입니다. 율법에 성년의 남자들은 반드시 명절에 예루살렘에 올라가 제사에 참여해야 합니다(16). 그래서 명절만 되면 몇십만 명이 모여들어 예루살렘은 인산인해를 이루었습니다.

이 명절이 어떤 명절인지 알 수 없지만, 학자들은 오순절이거나 부림절로 말합니다. 오순절은 모세가 시내산에서 십계명을 받은 날이자, 신약 시대에는 예수님이 부활 승천하신 후 50일 되던 날에 성령 강림하여 교회가 세워진 날입니다. 부림절은 모르드개와 에스더의 기도와 믿음으로 하만의 궤계를 물리치고 유대인들이 살아남은 역사를 기념하는 날입니다.

명절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기쁘고 즐겁습니다. 그러나 이 즐거운 명절에 우울하고 절망으로 그늘진 곳이 있었습니다. 예루살렘의 양문 곁에 히브리어로 베데스다라는 못이 있었는데, 베데스다는 자비의 집이란 뜻입니다. 그곳에는 명절과 거리가 먼 많은 병자, 맹인, 다리 저는 사람, 혈기 마른 사람들, 3차 진료의 대상들이 즐비하게 누워서 자비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한 가지 희망으로 이곳에 찾아왔습니다. 그들이 이곳에 와있는 이유는 베데스다 못에 천사가 가끔 내려와 물을 움직이는데, 움직일 때 먼저 들어가는 자는 어떤 병에 걸렸든지 낫게 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은 이 희망으로 어제도 오늘도 자비를 기다리며 누워있습니다. 그러나 베데스다는 자비의 집이 아니라 오히려 자비가 없는 절망의 집이었습니다. 왜냐하면, 물이 움직일 때 제일 먼저 들어가 일등을 한 한 사람을 빼놓고는 모두 패자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어느 기업가가 말한 것처럼 이곳은 1등만 기억할 뿐, 2등은 아무도 기억해 주지 않는 살벌한 장소였습니다. 사실 2등도 얼마나 어렵습니까? 저는 지금까지 일등은 그만두고 이등도 해보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일등만 존재한다니 얼마나 치열하게 경쟁해야 하겠습니까?

공산주의는 분배의 평등을 강조합니다. 똑같이 일하고 똑같이 분배하여 지상낙원을 이루겠다는 것입니다. 분배의 평등만 이루어진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평소에 베데스다는 서로가 의지하며 사는 자비의 집, 평등한 집으로 보였습니다. 맹인이 다리 저는 사람의 다리가 되어주고, 다리 저는 사람은 맹인의 눈이 되어주어 서로 돕고 돕는 지상낙원이었습니다. 그러나 물이 움직이는 순간, 지상낙원, 분배의 균등이란 단어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처럼 세상에 분배의 평등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공산주의 종주국인 러시아의 붕괴가 이를 말해 주고 있습니다.

자유민주주의, 자본주의는 분배의 균등이 아니라, 기회의 평등을 강조합니다. 누구에게나 골고루 기회가 주어진다면 이보다 좋은 사회가 어디 있겠습니까? 베데스다는 누구에게나 베데스다 못에 들어갈 기회의 평등이 주어져 있습니다. 그러나 기회의 균등이 문제 해결의 기회가 되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1등만 문제가 해결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이런 곳에는 일등이 되기 위해 치열한 경쟁을 해야 합니다. 바로 이것은 자유민주주의, 자본주의 한계요, 베데스다의 현장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이 없는 제도, 하나님이 없는 사상, 하나님이 없는 이즘, 하나님이 없는 이념(이데올로기)은 겉으로 자비의 집일 뿐이지, 진정 자비의 집이 될 수 없습니다. 그렇다고 베데스다는 없어도 문제이고 있어도 문제입니다. 베데스다는 이런 한계를 갖고 있지만 그렇다고 이곳을 떠날 수 없는 것이 인간의 비극입니다.

지금 우리가 사는 사회는 모든 것을 수량, 수치로 평가합니다. 그러니 꿈 많은 여고 시절을 꿈을 꾸며 보낼 수 없습니다. 대학 성적은 거의 상대평가입니다. 그리고 요즘은 입학하자 곧 취업을 위한 전선으로 뛰어듭니다. 기업은 성과 연봉제를 도입하여 서로 간에 경쟁이 치열합니다. 성과 연봉제는 인간의 약점을 이용하여 노동력을 최대한 이용하는 자본주의의 형태입니다.

토마스 홉스(Thomas Hobbes)의 말처럼 만인의,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 시대가 되어 가고 있습니다. 이런 경쟁 사회에 살다 보면 스트레스를 받아 각종 노이로제(neurosis)가 생기고 각종 질병이 생깁니다. 원형탈모증, 변비, 위장병, 두통, 불면증, 만성피곤증, 무기력과 우울감이라는 블루 환자가 생기게 됩니다. 더 심하면 자살하게 됩니다.

그러나 이런 곳에도 살맛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각종 동아리와 동호회를 만들어 각기 살맛을 찾아 즐기며 살아갑니다. 문제는 물이 움직일 때입니다. 다시 말하여 수요와 공급이 일치되지 않을 때 우정과 동정은 사라지고 치열한 경쟁만 있게 됩니다. 이런 사회에 진정한 우정과 진정한 행복과 기쁨이 있을 리 없습니다.

많은 병자 중에 서른여덟 해 된 병자는 베데스다 못에서 최고참이었고, 그를 모르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는 38년 동안 수없이 물이 움직이는 것을 보았지만 한 번도 1등을 하지 못해 자기보다 늦게 온 후배들이 당당하게 베데스다를 졸업하고 나가는 모습을 바라보며 어제도 오늘도 젖은 옷을 말려야 했습니다.

그는 젖은 옷을 말리며 이곳은 장유유서도 없느냐?” 탄식해 보지만 현실은 현실이었습니다. 그는 이제 하도 실패의 쓴잔을 마시다 보니 실패란 단어가 낯설지 않았습니다.

아마 부모님이나 친척이나 친구도 오랜 병에는 효자가 없다.”란 말처럼 오랫동안 누워있는 그를 사랑하기란 어려웠을 것입니다. 사랑한다고 해도 그를 어떻게 도울 수 없었습니다. 그는 이제 자신을 보아도 희망이 없고, 자신의 실력을 보아도 희망이 없고, 자신의 장래를 보아도 희망이 없고, 자신의 건강을 보아도 희망이 없었습니다. 이때 그를 찾아오신 한 분이 있었습니다.

2. 베데스다를 찾아오신 예수님(5:6)

예수께서 그 누운 것을 보시고 병이 벌써 오래된 줄 아시고 이르시되 네가 낫고자 하느냐”(5:6)

예수님은 서른여덟 해된 병자를 찾아오셔서 그를 보셨습니다. ‘보셨다( βλπω)’란 주목하여 자세히 관찰하셨다는 뜻입니다. 사람들은 에이 저런!’ 하며 외면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자애로운 모습으로 그를 보셨습니다. 사람들은 그를 귀찮은 존재로 보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를 목자의 심정으로 보셨습니다. 사람들은 그를 절망의 눈초리로 보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소망의 눈으로 보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를 보시고 병이 오래된 병자라는 사실을 아시고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낫고자 하느냐?” 이 예수님은 어떤 분입니까?

첫째, 희망의 예수님

그는 서른여덟 해를 누워있었으므로 피골이 상접하여 말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목욕을 안 해서 악취가 났을 것입니다. 눈동자는 풀려 썩은 동태눈 같았을 것입니다. 누가 보아도 사람 구실을 할 것 같지 않았습니다. 이런 사람은 누구도 거들떠보지 않습니다. 날씬하고 지성미와 야성미가 넘치는 사람에게 관심을 두지, 누가 이런 사람에게 관심을 두겠습니까?

우리 속담에 이왕이면 다홍치마라는 말처럼 괜찮다 싶은 사람에게 관심을 둡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이용가치가 있어야 사귑니다. 의사들도 어떤 가능성이 있을 때 관심을 가지고 돌봅니다. 사람들은 꺼져가는 심지 같은 사람, 상한 갈대와 같은 사람을 외면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누구도 희망을 두지 않고, 자기 자신조차도 희망을 두지 못하는 서른여덟 해 동안 누워있는 병자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낫고자 하느냐?” 이 예수님은 상한 갈대를 꺾지 않고 꺼져가는 심지도 끄지 않는 긍휼과 은혜의 주님이십니다. 예수님은 버려진 사람, 쓸모없는 사람을 찾으시는 희망의 예수님이십니다.

둘째, 소원을 심으시는 예수님

쇼생크 탈출이란 영화를 보면 감옥에서 사서를 보던 한 노인이 젊을 때는 석방되는 것이 유일한 소원이었지만, 50년 이상 감옥에서 살다 보니 석방되고 싶지 않았습니다. 사람이 그 생활에 익숙해져서 그런대로 살아가는 것을 현상 유지편향(status quo bias)이라고 합니다. 그는 서른여덟 해를 누워 살다 보니 누워있는 것이 체질화되어 낫고자 하는 소원과 의지도 없었습니다.

오래된 병자가 나음을 받으려면 낫고자 하는 소원, 낫고자 하는 의지가 있어야 합니다. 낫고자 하는 의지와 소원이 없으면 항생제로 목욕을 해도 낫지 않습니다. 낫고자 하는 소원이 없으면 일으켜 세워도 다시 눕습니다. 예수님은 그런 그의 마음에 낫고자 하는 소원을 심으셨습니다. 하나님은 그가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고자 하는 거룩한 소원을 갖고자 도우셨습니다.

사람에게는 누구나 나음을 받아야 할 오래된 병이 있습니다. 우리 민족은 해방된지 76년이 지났는데도 35년간 일제식민지 사관 교육으로, 알게 모르게 거지 근성과 노예근성에 젖어있습니다. 거지 근성으로 주는 것보다 받는 것을 좋아하고 일하기를 싫어하고 게으름에 빠져 있었습니다. 그리고 노예 철학은 내일이 없습니다. 누가 시키면 움직이고 시키지 않으면 하지 않습니다. 어떻게 하면 쉴 것인가에 관심이 있고, 자발적으로 하려 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순간의 쾌락만을 좇습니다.

그리고 자기를 너무 비하합니다. 울 밑에서 톡톡 튀는 봉선화를 처량하게 눈물을 흘리는 무덤가의 할미꽃으로 표현합니다. 이는 친일파 홍난파 씨가 작곡한 곡입니다. 그리고 패배주의와 열등감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올라가지 못할 나무는 쳐다보지도 말라고 합니다. 이 패배주의는 일제식민지 사관 교육의 대표적인 예입니다. “조센징이 뭘 할 수 있어!” 이것이 나 같은 사람이 어떻게 할 수 있어?”로 나타났습니다. 그리고 과시욕이 있습니다. 이런 것은 우리가 나음을 입어야 할 개인적인 병이요, 민족의 병입니다. 이런 병은 나음을 입어야 할 병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자신이 나음을 받아야 할 심각한 병자임을 모른다는 것입니다. 내가 이런 질병에서 나음을 받으려면 먼저 내가 환자라는 것을 알아야 하고, 다음은 이런 질병에서 낫고자 하는 소원이 있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내가 나음을 받아야 할 중병이 무엇입니까?

의존심, 원망과 불평, 패배감, 안일과 게으름, 든 것 없는 자만심, 변명, 의존심, 패배감, 운명주의, 이기심, 게임 중독, 한탕주의, 헛된 과시욕, 무개념, 결정장애.....하나님은 내가 이런 병자라는 것과 이런 질병에서 낫고자 하는 소원이 있을 때 나음을 받게 됩니다.

3. 일어나 걷게 하신 예수님(5;7~9)

예수님이 병자에게 소원을 묻자 그의 대답이 무엇입니까?

병자가 대답하되 주여 물이 움직일 때에 나를 못에 넣어 주는 사람이 없어 내가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가나이다.”(5:7)

그는 물이 움직일 때마다 못에 들어가려고 시도했습니다. 그가 포기하지 않고 서른여덟 해를 줄기차게 베데스다 못에 들어가고자 시도했다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요즈음 전문가가 우대를 받는 시대입니다. 그렇다면 한 우물을 파는 것은 좋습니다. 전문가가 되려면 한 우물을 파야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과정보다 결과를 중요시하고 결과(out put)가 나타나야 한다는데 어려움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낫고자 하느냐고 묻는 동시에 그의 대답은 가부간을 답하지 않고 자기를 못에 넣어 줄 한 사람이 없다고 대답했습니다. 이 짧은 말속에는 38년 동안 그의 삶과 생각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습니다. 그의 대답 속에는 지금까지의 패배감이 자신과 사회에 원망으로 나타났습니다. 그 패배감은 경험에 기초한 확실한 패배감이었습니다. 그리고 그의 대답 속에는 해도 안 된다는 나름대로 고정관념의 틀이 형성되어 있었습니다. 그것은 누구도 나를 도와주지 않는다는 의존심으로 나타났습니다.

무엇보다도 그의 문제는 내면에 하나님이 없었습니다. 하나님이 없으면 감사가 없고, 믿음으로 현 상황을 극복하기보다 환경에 굴복하게 됩니다. 그 마음에 하나님이 없으면 눈에 보이는 것들을 더 의지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많은 시간을 드러누워서 헛된 생각을 하게 됩니다.

만일 그가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있었다면 믿음으로 베데스다 못을 변화시키고 새 역사를 창조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를 어떻게 도왔습니까? “38년 동안 참 수고 많았다!” 하며 일으켜 세웠습니까? 예수님은 그에게 명령하셨습니다.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5:8)

이 말씀은 3중의 명령문입니다. ‘일어나라! 네 자리를 들라! 그리고 걸어가라!’ 예수님은 그를 불쌍하다고 동정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그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여 일어나 스스로 자리를 들고 걷도록 하셨습니다.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이 말씀은 절대적인 순종을 요구하는 말씀입니다. 순종하면 살고 순종하지 않으면 죽습니다. 그리고 이 명령은 믿음을 요구하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이 명령은 순종하기 힘든 말씀입니다. 그가 너무 오래 누워있었으므로 자리에서 일어난다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그리고 일어난다는 개념조차도 모를 수 있습니다. 또 그는 누가 일어날 줄 몰라서 그런 줄 아느냐?”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은 명령했습니다.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그는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했습니다. 그가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했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그는 마침내 믿음으로 자리를 들고 일어나 걸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능력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권세가 있습니다. 그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했을 때, 새로운 역사, 재창조의 역사, 새로운 삶이 시작되었습니다. 이처럼 누구든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믿음으로 순종하면 자리를 들고 일어나는 새로운 삶이 시작됩니다.

우리나라가 성경 말씀에 순종했을 때, 무덤가의 할미꽃과 같고 처량한 울 밑에 선 봉선화가 세계를 향해 톡톡 튀는 봉선화가 되었습니다. 6.25 전쟁 때 연합군 사령관이었던 맥아더는 기적이 일어나지 않는 한 이 나라가 다시 일어서기까지 100년은 걸릴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이런 한국이 가난을 딛고 일어났습니다. 2009ODA(공적개발원조) 대상국에서 원조를 주는 나라로 역할을 전환했습니다. 30년간 183개국에 66583억 원을 지원하였습니다. 최빈국으로 국제사회의 도움을 받던 나라에서 도움을 주는 나라로 탈바꿈한 첫 번째요 유일한 나라가 되었습니다.

남을 의존하던 데서 남을 돕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세계 여러 나라의 도움과 원조를 받던 한국 교회가 일어나 세계 각국에 2만 명이 넘는 선교사를 파송하였습니다. 그리고 삼성전자는 세계를 제패했던 일본 소니를 제쳤고, 이제 소니는 이름조차 사라졌습니다.

이는 전쟁으로 모든 것이 무너졌던 한 나라가 일본이 그토록 조센징은 안된다.”라는 식민지 사관을 심었던 우리나라가 이렇게 일어날 수 있었던 것은 성경 말씀을 따라 산 믿음의 승리입니다. 자립이 무엇입니까? 영어로 자립은 영어로 independent입니다. 이는 dependent in God, 하나님 안에서의 자립입니다. 말씀은 능력입니다. 말씀의 능력을 믿고 순종하면 개인이나 국가나 기적의 역사, 재창조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대학마을교회는 설립할 때부터 일어나 네 자리를 듣고 걸아가라.”라는 말씀을 줄기차게 전하고 심었습니다. 그랬을 때 서울대를 지원했다가 낙방하고 인하대, 1호선을 탔다는 패배감으로 누워있던 젊은이들이 운명과 패배감을 극복하고 믿음의 거장들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라고 하신 주님의 말씀을 순종하는 자립적인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대학마을교회는 개척 2년째, 천안 UBF를 지원했습니다. 대전UBF 센터 건축할 때는 대전에서 헌금한 것에 2000만 원에 100만 원을 더해서 헌금했습니다. 지난해는 코로나로 한국 교회가 힘든 해였습니다. 그러나 우리교회 일 년 결산해볼 때 어려운 선교사들과 이웃을 지원했습니다. 우리 교회가 존재하는 한 운명의 자리, 패배감의 자리, 원망과 불평의 자리, 낙심의 자리를 들고 일어나 열방을 향해 주고 섬기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주경 학자들은 38년이란 이스라엘 광야 40년을 가리킨다고 합니다. 애굽을 떠나 가나안에 도착한 해를 빼면 광야 기간은 38년이 됩니다. 38년간 그들은 광야에서 지쳐서 때론 포기하고 자리에 눕기도 했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그들을 일으켜 끝까지 가나안으로 인도하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나라에 가는 여정에서 때론 낙심하여 주저앉아 눕기도 합니다. 코로나19가 길어지고 확산 일로에 처하게 되니 모두가 힘들어합니다. 특히 운동장에서 신나게 뛰놀아야 할 아이들이 마스크를 쓰고 집콕하고 있으니 얼마나 힘들겠습니까? 예수님은 이런 우리에게 소원을 심고 일어나 순례의 길을 다시 걷도록 하십니다.

세상은 겉으로 보면 베데스다처럼 아름답게 보입니다. 지금 북한 동포들에게 주체사상은 희망의 베데스다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고난의 행군을 다시 선포했습니다. 한편 남한의 베데스다는 AI입니다. 모든 게 AI가 해결할 줄로 생각합니다. 그런데 AI가 코로나19 앞에 그 한계가 드러났습니다. 이로써 절망과 분노와 좌절과 우울감과 무기력인 코로나19 블루 환자들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오늘 베데스다 못가에 예수님이 오셨습니다. 이 예수님은 모든 사람에게 자비가 되십니다. 예수님께는 한계도, 제한도 없습니다. 1등만이 아니라 꼴찌에게도 이 문은 활짝 열려 있습니다. 꼴찌도 예수님께 나오면 1등이 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모든 이에게 희망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말씀은 권능이 있어서 우리의 삶을 바꾸어 놓습니다. 이제 우리는 어떤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까? 우리는 자비로운 예수님의 낫고자 하는 소원을 듣고 말씀에 순종하여 새로운 재창조의 역사를 이루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언제까지 원망과 불평, 신세 한탄, 운명과 좌절의 자리에 누워있어야 하겠습니까? 예수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네가 낫고자 하느냐?” “일어나 네 자리를 듣고 걸어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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