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9:1~7

예수님 안에는 운명이 없다.

내가 세상에 있는 동안에는 세상의 빛이로라.”(9:5)

 

 

본문에는 날 때부터 맹인인 한 사람이 나옵니다. 인간적으로 보면 그는 불행한 사람이요, 슬픔의 사람입니다. 제자들은 맹인을 보자 예수님께 심각하게 질문했습니다. “랍비여 이 사람이 맹인으로 난 것이 누구의 죄로 인함입니까? 자기입니까 그의 부모입니까?”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 사람이나 그 부모의 죄로 인함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라고 대답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한 걸음 더 나아가 땅에 침을 뱉어 진흙을 이겨 그의 눈에 바르시고 실로암에 가서 씻으라고 하심으로 눈을 뜨게 하셨습니다. 맹인의 눈을 뜨게 하신 예수님은 세상의 빛입니다. 우리가 세상의 빛 되신 예수님을 만나 운명을 극복하고 빛 된 삶을 살기를 기도합니다.

1. 불행에는 하나님의 선한 뜻이 있다(9:1~3)

예수님께서 길 가실 때에 날 때부터 맹인된 사람을 보셨습니다. 세상에 불행한 사람이 많이 있지만, 맹인보다 더 불행한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사람에게는 많은 즐거움이 있는데, 그 중에 보는 즐거움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아름다운 자연을 보기 위해 여행합니다. 그것으로 부족해 사진과 동영상을 찍습니다. 그런데 이 맹인 거지에게는 보는 즐거움이 없습니다. 또한, 눈으로 95%의 정보를 얻습니다. 그런데 그는 볼 수 없어서 정보를 얻을 수 없습니다.

또한 예수님은 눈은 몸의 등불이라고 하셨습니다. 사람이 눈이 어두우면 생각도 어둡고 생활도 어둡습니다. 거기다가 그는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거지가 되어 매일 전철역에 나가서 하모니카를 불며 한 푼 줍쇼! 한 푼 줍쇼!’ 하며 사람들에게 동정을 구했습니다. 이 얼마나 슬픈 사람입니까?

이런 맹인을 본 제자들은 예수님께 갑자기 질문했습니다. “랍비여 이 사람이 맹인으로 난 것이 누구의 죄로 인함입이까? 자기입니까? 아니면 그의 부모입니까?” 그 사람이 어떤 질문을 하는가를 보면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가를 알 수 있습니다. 좀 생각하는 사람은 내가 무엇을 위하여 살 때 진정으로 의미가 있고 가치가 있는가?’ 등의 문제를 놓고 생각하고 질문하고 대화합니다.

그러나 현실의 흐름을 좇아 사는 사람은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어떤 차를 탈까? 어떤 집에 살까?’에 관심을 두고 그런 곳에 눈길을 돌리고 그런 것을 주제로 질문하고 대화합니다.

제자들은 맹인을 보자 누구의 죄로 이렇게 되었는가, 다소 무거운 철학과 신학적인 주제로 예수님께 질문했습니다. 제자들이 왜 보통 스쳐 지나갈 수 있는 문제를 가지고 심각하게 질문했을까요? 이는 그의 모습에서 자신들의 문제를 보았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은 맹인을 보자 불쌍한 생각이 들어 동전 한 닢 넣어 주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주머니에는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그들은 맹인의 모습에서 가난한 자신과 억눌린 조국의 모습이 오버랩(overlap) 되었습니다. 이보다도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은 인간이 당하는 고난과 불행을 죄 문제로 보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부자는 의인이고 가난하고 병든 사람은 죄인으로 취급했습니다. 병들고 가난한 사람, 그리고 몸이 불편한 사람을 무시하고 업신여겼습니다. 제자들도 맹인된 것을 죄로 보았고 하나님의 저주로 생각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따라다니지만, 유대교 사상이 그들의 의식과 무의식의 세계를 지배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면 모든 불행의 원인이 누구의 죄 때문입니까? 그는 날 때부터 보지 못하므로 자신의 죄로 맹인이 된 것은 아닙니다. 그러면 부모의 죄로 맹인이 되었다면 이보다 불공평한 것은 없습니다. 그러면 자기의 죄도 아니고 부모의 죄도 아니라면 원인이 하나님께로 돌아가게 됩니다.

하나님은 선하신 분입니다. 모든 사람에게 복을 주기를 원하십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모든 불행의 원인이 된다면 이런 모순은 없습니다. 또 이 질문은 알아도 해결할 수 없습니다.

오늘날 여러 문제로 사회가 시끄럽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인생 문제로 괴롭습니다. 그러면 이 모든 것이 누구의 문제입니까? 정부의 잘못입니까? 사회 구조의 모순 때문입니까? 조상을 잘 만나지 못해 흙수저로 태어난 것이 문제입니까? 아니면 유전자 문제입니까? 우리가 이런 문제를 놓고 아무리 생각해도 답이 나오지 않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제자들의 질문에 무엇이라고 대답하셨습니까? “이 사람이나 그 부모의 죄로 인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9:3)라고 대답하셨습니다.

제자들은 맹인 편에서 보았습니다. 우리가 불행의 원인을 내 편에서 보면 슬픔의 사람, 운명의 사람이 됩니다. 나는 왜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났을까? 왜 나는 이런 질병을 안고 태어났을까? 그러다 보면 앞이 잘 보이지 않습니다. 살 의욕이 없어집니다. 해결책이 보이지 않습니다. 불신이 생기고 체념하게 되고 마음이 강퍅하게 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님의 선하신 주권 편에서 문제를 보셨습니다. 사람들은 대개 원인을 과거에 둡니다. 현재의 결과를 과거의 원인에서 찾습니다. 과거에서 원인을 찾다가 궁색해지면 전생에 무슨 죄가 있어서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또 미래의 결과를 현재로 돌립니다. 그러나 인간의 불행의 원인이 모두 죄 때문만은 아닙니다. 그 예로 구약에 나오는 욥을 들 수 있습니다. 욥은 하나님 앞에서 의로운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그가 견디기 어려운 고통을 겪었습니다. 이는 사탄의 시기로 인함이었습니다. 그가 이 시련을 이겼을 때 순금보다 더 귀한 믿음을 갖게 되었습니다.

이를 볼 때 현재의 불행은 과거나 현재가 아니라 미래입니다. 예를 들어 돈이 없어 어렵게 공부하는 학생은 전생에 무슨 죄가 있어서 그런 것이 아닙니다. 이는 앞날을 위해서 어렵게 공부하는 것입니다. 서정주 시인은 한 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소쩍새는 저렇게 울었나보다고 노래했습니다. 해산의 고통은 미래의 생명을 잉태하기 위한 것입니다.

비록 맹인이 몇십 년 동안 보지 못하는 맹인으로 산 것도 앞으로 하나님의 하실 일을 나타내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이 하실 일이란 하나님의 구속 역사에 쓰임 받는 것을 뜻합니다. 그를 통해 많은 사람에게 예수님이 증거될 수 있습니다. 현재 나의 처지가 이렇게 된 것은 조상을 잘못 만나 그런 것이 아니라 그런 사람에게 복음을 증언하도록 함에 있습니다.

내가 대학생이 되고, 회사원이 되고, 선생님이 되고, 대학원생이 되고, 교수가 되고, 박사가 되고, 의사가 되고, 간호사가 되고, 각양 전문가가 된 것은 그런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도록 함에 있습니다. 내가 가난한 가정에 태어난 것도 그런 슬픔을 가진 사람들을 돕도록 함에 있습니다. 이를 일컬어 cultural mandate(문화적인 위임)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모든 불행과 아픔과 고난은 복음을 전할 기회요, 복음을 영접할 좋은 기회가 됩니다.

사람들은 대개 인간의 행복을 인간 조건과 환경에서 찾습니다. 그러나 인간 조건과 역경을 뚫고 행복을 창조한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구약 성경에 요셉은 결손가정에서 출생해서 어린 시절부터 배다른 형들로부터 미운 물건이 되었습니다. 그는 형들의 미움과 시기로 애굽의 노예로 팔렸습니다. 그는 주인인 보디발 부인의 모함으로 옥에 갇히는 파란만장한 삶을 살아야 했습니다. 그는 일생을 형들에 대한 미움으로 살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하나님의 뜻을 발견했습니다. 그의 고백을 보겠습니다,

당신들이 나를 이곳에 팔았다고 해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이다 이 땅에 이 년 동안 흉년이 들었으나, 아직 오 년은 밭갈이도 못하고 추수도 못할지라 하나님이 큰 구원으로 당신들의 생명을 보존하고 당신들의 후손을 세상에 두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니 그런즉 나를 이리로 보낸 이는 당신들이 아니요 하나님이시라 하나님이 나를 바로에게 아버지로 삼으시고 그 온 집의 주로 삼으시며 애굽 온 땅의 통치자로 삼으셨나이다.”(45:5~8)

헬렌 켈러는 일찍 눈이 보이지 않고 귀가 먹고 말을 하지 못하는 농아였습니다. 그녀는 가장 불행한 모습으로 태어났습니다. 그런 그가 하나님 앞에서 선한 뜻을 발견하고 슬픈 운명을 극복하고 아름다운 삶을 살았습니다. 그리고 그녀는 모든 장애인에게 희망을 주었습니다. 모든 이에게 환경을 극복하는 예를 남겼습니다.

프랜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은 소아마비였습니다. 그런 그가 환경을 극복하고 미국의 4선 대통령이 되었습니다. 존 밀턴은 말년에 눈이 보이지 않아 아무것도 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 그가 자신의 신체적인 조건을 넘어서서 딸들의 도움으로 불후의 명작인 실낙원을 썼습니다. 천재 물리학자 스티븐 호킹은 루게릭병으로 자신의 몸 하나 가눌 수 없었습니다. 그런 그가 자신의 신체적인 조건을 넘어서서 세계적인 물리학자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지구상에서 유일하게 남북분단의 슬픔을 안고 삽니다. 여기에도 하나님의 선하신 뜻이 있습니다. 우리에게 질병이 있습니다. 우리에게 운명과 슬픈 문제가 있습니다. 여기에 모두 하나님의 선한 뜻이 있습니다. 하나님 안에는 운명이 없습니다. 하나님 안에는 모두가 선하신 하나님의 뜻이 있습니다. 하나님 안에는 오직 하나님의 섭리만 있을 뿐입니다.

하나님은 합력하여 선을 이루십니다. 이처럼 우리가 하나님의 선하신 주권 편에서 보면 운명과 절망이 없습니다. 모든 것이 밝고 희망이 있습니다. 운명이 섭리로, 절망이 희망으로, 불행이 행복으로 바꾸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두신 뜻을 기대하며 살 수 있습니다. 범사에 감사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안에서 내게 두신 뜻을 찾아 행복하고 즐겁고 복된 삶을 살기를 기도합니다.

2. 빛 되신 예수님(9:4~5)

때가 아직 낮이매 나를 보내신 이의 일을 우리가 하여야 하리라 밤이 오리니 그때는 아무도 일할 수 없느니라.”(9:4)

제자들은 슬픈 운명적인 생각에 빠져 아무 일도 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왜 열심히 하나님의 일을 해야 합니까?

첫째, 때가 아직 낮이기 때문이다.

은 생명이 있는 때요, 왕성하게 일할 수 있는 청년의 때입니다. 반면에 은 일할 수 없는 때입니다. 우리가 늙으면 일할 수 없습니다. 밤은 죽음의 때요, 종말의 때입니다. 우리가 몸이 쇠하고 늙으면 일할 수 없습니다. 더구나 죽으면 일하고 싶어도 일할 수 없습니다. 성경은 네 손이 일을 얻는 대로 힘을 다하여 할지어다 네가 장차 들어갈 스올에는 일도 없고 계획도 없고 지식도 없고 지혜도 없음이니라.”(9:10)라고 했습니다.

일하는 데에는 때가 있습니다. 젊었을 때 하나님을 위해 열심히 일해야 합니다. 청년의 때는 영원한 것이 아닙니다. 인간은 영원한 것이 아닙니다. 영어 성경을 보면 “Night is coming.”이라고 했습니다. 밤은 지금도 오고 있습니다. 일할 수 없는 늙음이 지금도 우리를 향해 다가오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영원히 살 것처럼 생각하며 삶을 즐기려고 합니다. 우리의 삶은 생각하는 만큼 길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현재 열심히 하나님의 일을 해야 합니다.

둘째, 예수님은 세상의 빛이기 때문이다.

세상은 어둡고 불의합니다. 내 마음도 각종 문제로 어둡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세상의 빛입니다. 빛 되신 예수님은 우리에게 가야 할 방향을 제시해 주십니다. 빛 되신 예수님은 어두운 생각에서 밝은 생각을 하도록 하십니다. 빛 되신 예수님은 죽음의 세력 아래에 있는 사람에게 생명을 주십니다. 빛 되신 예수님은 우리에게 힘과 용기를 주십니다. 빛 되신 예수님을 믿을 때 어둡고 불의한 환경과 역경을 넘어서 역사의 주역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하고 싶으나 빛 되신 예수님이 계시지 않으면 생각이 어두워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내 안에 예수님이 안 계시면 어둡고 운명적인 생각으로 아무 일도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빛 되신 예수님을 믿으면 절망하거나 좌절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빛 되신 예수님을 영접하면 현재의 환경을 이기고 지금 하나님의 뜻을 섬길 수 있습니다. 예수님 안에는 오직 희망만 있습니다.

3. 침과 진흙을 가지고 일하신 예수님(9:6~7)

예수님은 맹인의 눈을 뜨게 하고자 했지만, 수술 기구도 없고 약도 없었습니다. 하늘을 쳐다보니 구름 한 점 없었습니다. 좌우를 돌아보니 제자들이 눈을 말똥말똥 뜨고 맹인만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이런 환경에서 예수님은 땅을 쳐다보았습니다. 그런데 거기에 무엇이 보였습니다. 그것은 진흙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허리를 굽혀 진흙을 한 움큼 떼었습니다. 그리고 진흙을 이기려고 물을 찾아보았습니다. 그런데 물이 없었습니다. 이때 사람들은 일하기를 포기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런 환경에서 어떻게 하셨습니까?

이 말씀을 하시고 땅에 침을 뱉아 진흙을 이겨 그의 눈에 바르시고”(9:6)

예수님은 실망하시지 않고 침을 뱉기 시작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열심히 침으로 진흙을 이겨 수제비처럼 반죽해 그것을 떼어 맹인의 눈에 발랐습니다. 그런 후에 예수님은 그에게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이르시되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 하시니(실로암은 번역하면 보냄을 받았다는 뜻이라.)(9:7)

예수님이 왜 씻고 오라고 하셨을까요? 손으로 안수해 눈을 뜨게 하시든지, 아니면 실로암에 가서 물을 떠 와서 밀가루를 사서 눈에 발라 뜨게 하시든지 해야지, 왜 그렇게 했을까요? 이는 제자들의 마음에 깊이 박혀 있는 운명적인 생각으로 환경과 조건을 탓하는 그들에게 환경과 조건을 넘어 일할 수 있는 지혜를 가르쳐 주시기 위함입니다.

예수님의 일하시는 방법은 비위생적이고 비과학적인 것처럼 보입니다. 매너나 기교도 없어 보입니다. 방법도 안 좋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역사를 창조하는 비결입니다. 예수님은 일할 수 있는 환경이 갖추어지지 않았다고 낙심하거나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예수님은 할 수 있는 것을 찾으시고 현재 있는 것으로 일하십니다.

진흙과 침은 어디에나 있습니다. 누구나 일하고자 하면 얼마든지 일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일할 수 있는 환경이 갖추어지지 않으면 일을 시작하지 않습니다. 요즈음 코로나19로 복음을 전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일을 하고자 하면 얼마든지 할 수 있습니다. 영상 매체를 가지고 더 활발하게 복음을 전할 수 있습니다. 인하대학교 온라인 수업이 대면 수업보다 선호도가 높은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편에서 생각하면 얼마든지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일은 방법이 문제가 아니라 믿음이 문제입니다.

맹인은 예수님의 말씀에 그대로 순종했습니다. 실로암으로 가라고 했을 때 갔습니다. 씻으라 했을 때 씻고 왔습니다. 사실 그가 순종한다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실로암까지의 거리는 약 2Km입니다. 그리고 맹인은 감수성이 예민하고 자의식도 많고 자존심이 강합니다. 맹인은 예수님이 침 뱉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그는 해도 너무한다며 반발할 수 있습니다. 또 가서 씻으면 눈이 떠진다고도 희망의 말씀을 하시지 않고 무조건 씻고 오라 했습니다. 그는 가면서 별생각을 다 했을 것입니다. ‘내가 차라리 맹인으로 사는 것이 낫지!’ 하며 도중에 그만둘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모든 환경과 조건을 믿음으로 이기고 실로암에 가서 눈을 씻었습니다. 그때 그의 눈이 떠졌습니다. 그 순간, 실로암 못에 비친 자신의 아름다운 얼굴을 보았습니다. 아름답고 환한 세상을 보았습니다. 그때 그의 얼굴이 환해졌습니다. 그의 마음도 밝아졌습니다. 이제 어둡고 절망적인 생각이 사라졌습니다. 이제 그는 아름다운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맹인의 빛이 되셨습니다.

예수님은 세상의 빛입니다. 누구든지 빛 되신 예수님을 만나면 어두운 생각이 사라지고 밝은 생각으로 가득하게 됩니다. 예수님 안에는 운명이 없습니다. 우리가 세상의 빛, 예수님을 만나 어두운 운명적인 어두운 생각에서 벗어나 밝은 삶을 살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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