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제 12강(말씀, 4:13-31, 요절 4:19)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

“베드로와 요한이 대답하여 가로되 하나님 앞에서 너희 말 듣는 것이 하나님 말씀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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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공회원들이 사도들에 대해서 부인할 수 없는 점이 무엇이었습니까(13-16)? 또 어떻게 그들을 위협하며 경계했습니까(17,18)?

2. 이런 위협에도 불구하고 왜 그들은 예수님의 이름으로 말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까(19,20)? 복음을 담대히 전하는 베드로부터 배울 바가 무엇입니까? 왜 관원들은 그들을 더 이상 그들을 놓아둘 수 밖에 없었습니까(21,22)?

3. 옥에서 나온 사도들의 말을 들은 성도들은 누구를 찬송했으며 하나님은 어떤 분입니까(23-24)? 그들의 간절한 기도 제목이 무엇입니까(25-30)? 그 결과가 어떠합니까(31)? 그들로부터 배울 바가 무엇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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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의 대적자들은 어제나 오늘이나 여전히 믿는 사람들을 핍박하고 대적하고 불신을 심어 교회를 혼란케 하고 교회를 떠나도록 합니다. 그래서 학자들은 지상의 교회를 일컬어 전투적인 교회라고 합니다. 이는 복음의 대적들과 싸워 이겨야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 믿는 사람들이 그들과 싸워 이기려면 성령 충만해야 합니다. 오늘 말씀에서 사도 베드로와 요한은 성령 충만하였습니다(행4:8). 그들이 성령 충만했을 때에 복음의 대적자들 앞에서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을 기탄없이 전했습니다.

殉敎史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느 크리스천이 재판장 앞에 붙잡혀왔습니다. 재판장은 크리스천에게 태형을 가했습니다. 그는 얼굴 한번 찡그리지 않고 오히려 웃으며 빙그레 웃으며 찬송을 불렀습니다. 그는 죽인다고 해도 웃으며 찬송을 불렀습니다. 그러자 옆에서 재판장을 보좌하던 사람이 저 자는 아무리 때려도 소용이 없습니다. 때리면 때릴수록 그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매를 맞는다고 좋아합니다. 그러자 재판장은 그에게 저자를 죽이면 되겠나? 물었습니다. 그는 그가 죽게 되면 주님을 위해 순교하게 되었다고 더 좋아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유배를 보내면 되겠나? 물었습니다. 그러자 그가 유배를 가게 되면 하나님께 조용히 기도하게 되니 더 좋아할게 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재판장은 그에게 때려도 안되고, 죽여도 안되고, 유배를 보내도 안되니, 어떻게 하면 되겠는가 물었습니다. 그러자 그는 “돈을 많이 주어서 타락을 하게 하십시오. 저들이 제일 무서워하는 것은 죄입니다. 죄를 짓게 하십시오” 하였다고 합니다.

하물며 순교자들도 그러했거늘 성령이 충만한 베드로와 요한이야 어떠하였겠습니까? 그 순간 베드로와 요한에게 태형을 가한다고 주님을 부인하겠습니까? 그들의 재산을 몰수한다고 침묵하겠습니까? 죽이겠다고 협박을 한다고 복음 전하는 것을 포기하겠습니까? 그들은 조금도 위축되지 않고 그들에게 기탄없이 십자가와 부활을 전했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어떤 장애물 앞에서도 위축되지 않고 담대하게 나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전하는 사도들의 믿음을 배우기를 기도합니다.

첫째, 법정에서의 베드로와 요한(12-22). 베드로와 요한이 성령 충만하여 기탄없이 복음을 전하자 공회원들이 놀랐습니다. 13절을 보겠습니다. “저희가 베드로와 요한이 기탄없이 말함을 보고 그 본래 학문 없는 범인으로 알았다가 이상히 여기며 또 그 전에 예수와 함께 있던 줄도 알고” 기탄이란 영어로 courage, 용기입니다. 용기는 만용과 다릅니다. 만용은 헛된 자기 과신이라면 용기는 어떤 사람을 대할지라도 거리낌이나 부끄러움이 없는 도덕적 심성을 의미합니다. 이런 용기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믿는 믿음에서 옵니다. 베드로는 과거 주님이 가시는 곳이라면 죽는 데까지 가겠다고 호언장담했습니다. 그런데 그는 얼마 못가 계집종 앞에서 조차 예수님을 부인했습니다. 그것도 세 번씩이나 부인했습니다. 그런 그가 성령 충만했을 때에 핍박자들 앞에서 기탄없이 복음을 전했습니다. 이런 용기는 만용이나 인간의 의지에서 나오는 용기가 아니라 성령께서 주시는 신령한 용기입니다.

관원들은 기탄없이 말하는 베드로와 요한이 학문이 없는 범인이라는데 놀랐습니다. ‘학문이 없다’는 것은 무식하다는 것이 아니라 예루살렘의 산헤드린에서 정통 신학 공부를 하지 않았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들은 산헤드린에서 정통학문이 없는 사람들임에도 불구하고 구약성경을 자유자재로 인용하여 부활하신 예수님을 전하였습니다. 이에 그들은 그만 놀라고 말았습니다. 거기다가 그들이 산헤드린에서 공부를 한 적이 없는 예수와 함께 있었던 사람들이라는데 놀랐습니다. 뿐만 아니라 40년간 앉은뱅이로 성전 미문 곁에 앉아서 빌어먹던 그가 일어나 사도들과 함께 앉아있는 것을 보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14). 그러자 그들은 더 이상 베드로와 요한을 힐문할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자기들끼리 의논하고자 베드로와 요한을 법정 밖으로 잠시 내보냈습니다(15).

그들은 두 사도를 불러 조건을 붙여 석방하였습니다(16,17). 그들의 석방 조건이 무엇이었습니까? 18절을 보겠습니다. “그들을 불러 경계하여 도무지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 말고 가르치지도 말라 하니” 그들은 사도들에게 나가서 다시는 예수가 부활했다는 그런 말은 아예 입 밖에 내지도 말라고 했습니다. 유대의 법에는 초범인 경우에는 경고를 하고 풀어주지만 재범인 경우에는 사십에 하나 감한 39번의 채찍을 가하게 되어 있습니다. 이런 법을 아는 베드로와 요한은 그들의 경고가 얼마나 무서운가를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때 그들은 ‘겉으로는 알겠습니다.’라고 대답하고 속으로는 ‘봐라 내가 나가서 복음을 전하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게 아마 현명한 방법일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들의 대답이 어떠합니까? 19절을 보겠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대답하여 가로되 하나님 앞에서 너희 말 듣는 것이 하나님 말씀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 베드로와 요한은 태형이 두렵지 않았습니다. 죽음이 두렵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그들과 타협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하나님 앞에서 사람의 말을 듣는 것이 옳은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 옳은가 판단하여 보라고 했습니다. 사람이 사람 앞에서 살면 삽살개처럼 사람 눈치를 보게 됩니다. 사람 앞에 살면 위선적인 삶을 살게 됩니다. 그래서 자신의 내면의 모습이 드러나는 둣싶다하면 괴로워합니다. 그리고 사람들 앞에서 살면 항상 타협적입니다. 언제든지 발을 뺄 수 있도록 중간 지대, 회색 지대, 경계선상에 서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의 특징은 고백적 신앙이 없습니다. 그러나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살면 하나님이 늘 나를 지켜보고 계신다는 자아의식을 갖게 됩니다. 이 때 하나님의 눈을 의식하게 됩니다. 사람이 있든 없던 믿음의 중심을 지킵니다. 죄를 짓지 않고 위선적인 삶을 살지 않게 됩니다. 사람이 왜 죄를 짓습니까? 사람들이 보는 백주 대낮에 대로상에서 죄를 짓는 사람은 없습니다. 사람들이 보지 않는 야심이나 인적이 드문 곳에서 죄를 짓습니다. 많은 여성들을 성폭행한 발발리가 잡혔습니다. 그는 새벽 인적이 뜸한 곳에서 범죄를 일삼았다고 합니다.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살 때, 하나님이 지금도 나를 보고 계신다고 생각할 때 죄를 지을 수 없습니다.

요셉이 형들에게 은 30에 노예로 팔려 보디발 가정 총무가 되었을 때에 보디발 여사가 미소년 요셉을 유혹했습니다. 하루는 보디발 여사가 ‘지금 주인이 없고 너와 단 둘만 있다’며 옷을 붙잡고 유혹했습니다. 그때 요셉은 ‘하나님 앞에서 죄를 지을 수 없다’며 옷을 벗어버리고 도망갔습니다. 요셉은 하나님 앞에서 살았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사는 자는 결코 죄를 지을 수 없습니다. 베드로 또한 하나님 앞에서 살았습니다. 그때 그는 핍박자들 앞에서 기탄없이 사람들의 말을 듣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여 보라고 반문하였습니다. 여기에서 ‘옳은가’는 선이냐 악이냐를 묻는 것이 아닙니다. 헬라어로 ‘디카이오스’로 의냐 불의냐? 어느 쪽이 의로우냐? 어느 쪽이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옳으냐? 사람의 말을 듣는 것이 하나님과 옳은 관계냐? 아니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 하나님과의 옳은 관계냐? 어느 것이 옳으냐는 것입니다.

그 사람이 하나님을 믿는 하나님 중심의 사람인가, 아니면 하나님보다 사람을 믿는 인간 중심인가를 알 수 있는 비결은 말씀에 대한 자세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보다 사람의 말을 듣는 것이 옳다고 하는 사람은 인본주의자입니다. 반면에 사람의 말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 옳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신본주의자, 믿음의 사람입니다. 신앙의 원리는 사람의 말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우선합니다. 여러분들 중에 하나님의 말씀보다 사람의 말을 우선하는 분이 있다면 그것은 신앙의 원리에 맞지 않습니다. 성경의 원리는 항상 하나님의 말씀을 앞세웁니다. 예수님은 ‘너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고 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말씀을 사람의 말보다 앞세워야 합니다. 사람을 보지 말고 하나님을 먼저 보아야 합니다. 눈치를 봐도 하나님의 눈치를 보아야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초기에 직장생활에서 실패하는 것은 상사와 직장 동료 눈치를 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물론 직장에서 상사나 동료와 좋은 관계를 맺어 나가야 합니다. 그러나 그보다 먼저 우리는 하나님의 눈을 먼저 의식해야 합니다.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는 것을 최우선으로 하여야 합니다. 그때 승리하는 크리스천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20절을 보겠습니다.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 하니” 베드로는 우리가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고 했습니다. 그들은 주님의 부활을 목격했고, 주님께서 말씀하신 것을 직접 들은 직제자들이었습니다. 베드로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목에 칼이 들어와도 본 것과 들은 것을 부인할 수 없었습니다. 보고 들은 것을 입을 봉한 채로 살 수 없었습니다. 베드로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할 수 없는 불가항력의 사명이 있었습니다. 사도 베드로의 이런 신령한 용기, 이런 불타는 사명감이 어디에서 왔을까요? 베드로를 움직인 동력은 과연 무엇이었을까요? 일반 사람들에게는 흔히 돈이 그 사람의 행동을 움직이는 동인이 됩니다. 사람들이 삼성을 선호하는 이유는 여러 원인이 있겠지만 월급을 많이 주기 때문일 것입니다. 돈은 귀신도 부립니다. 돈은 사람을 가장 강력하게 움직이는 원인이 됩니다. 요즘에는 돈의 위력이 권력과 명예보다 앞섭니다. 그러나 베드로를 움직인 동인은 주님께 대한 사랑이었습니다. 주님께 대한 사랑은 베드로로 하여금 복음의 원수들 앞에서 기탄없이 말하도록 하게 했습니다. 사랑은 사람을 눈에 뵈는데 없게 만듭니다. 사랑은 죽음조차도 두렵지 않게 합니다.

사도 바울의 불타는 사명 또한 어디에서 왔습니까? 사도 바울 의 불타는 사명 또한 예수님의 사랑에서 비롯되었습니다. 고린도후서 5:14절을 보겠습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 ‘강권하다’란 제어하다, 또는 마부가 말을 몰듯이 밀어 낸다는 뜻입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불가항력적으로 바울을 밀어내었습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바울의 마음을 사로잡아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견디지 못하도록 만들었습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바울을 둘러싸고 밀어내어 적당히 신앙생활을 할 수 없도록 만들었습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파도처럼 밀려오기 때문에, 그의 심장에서 그리스도의 사랑이 솟구쳐 올라오기 때문에 가만히 앉아 있을 수 없었습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은 그를 세상으로 향하는 마음을 제어하고 하나님과 양들에게로 가게 했습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그를 주와 복음을 위하여 헌신하게 했습니다.

사람이 사랑을 느낄 때와 공포를 느낄 때에 사람의 능력의 차이는 10배가 된다고 합니다. 사람이 보통 때에는 그 사람의 잠재력을 다 발휘할 수가 없지만 큰사랑을 느끼게 되면 상상할 수 없는 놀라운 능력이 솟아올라 자기가 가진 그 잠재력의 모든 능력을 10분 발휘하게 합니다. 그래서 병마도 이기고, 지혜도 생기고, 능력도 생깁니다. 반면에 두려워하고, 의심하고, 낙심하면 자기 힘이 다 소진되어 자기가 가진 능력도 발휘할 수 없는 초라한 존재로 전락하게 됩니다.

오늘날 저와 여러분이 공통적으로 느끼는 것이 무엇입니까? 용기가 없고 나약하다는 것이 아닐까요? 사람들이 담대함이 없습니다. 삶의 스케일이 밴뱅이 뱃속처럼 째째합니다. 주님께 헌금을 드리는 것도 째째합니다. 주님께 봉사하는 것도 째째합니다. 야성이 없습니다. 젊은이답지 못합니다. 젊은이의 특징은 세련된 것보다는 좀 투박하고 포효하는 호랑이처럼 야성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젊은이들이 소심합니다. 손익 계산에 재빠르고, 이재에 너무 밝습니다. 이재에는 좀 어리숙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재에 너무 밝으면 부자 못됩니다. 복음을 위해 지갑도 열고, 통장도 열고, 복음을 위해 젊음과 자신을 불태울 수 있어야 합니다. 주님을 위해 전공도 포기할 수 있는 그런 헌신과 용기가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단 한번 밖에 없는 삶을 이렇게 째째하게 살아서 되겠습니까? 우리가 베드로와 요한과 같이 하나님의 사랑에 강권되어 가정과 캠퍼스, 직장에서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기를 기도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크고 놀라운 사랑을 느끼고 감격하여 두려움을 이기고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여 이 시대와 이 민족을 변혁하여 아름다운 기독교 문화를 만들어 나가기를 기도합니다.

둘째, 사도들을 위해 기도하는 성도들(23-31). 초대 교회는 성령 충만하여 사도들의 권세가 있었고, 이적의 역사와 은혜의 역사, 서로 돕고 도와주는 유무상통과 사랑의 교제가 있었습니다. 그런 교회에 핍박이 있다는 것은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성령 충만한 교회에 왜 핍박이 있는 것입니까? 성령 충만한 교회일수록 핍박이 있습니다. 반면에 성령 충만하지 않은 교회는 복음은 전하지 않고 서로 마주 앉아 서로 허물과 흉을 보고, 서로 정죄하고 불평하고 원망이나 하기 때문에 핍박이 있을리 없습니다. 그런 교회는 성도들끼리 싸움만 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성령 충만한 교회는 복음을 전하기 때문에 핍박을 받게 됩니다. 사도들은 옥에서 나와 그 동료들에게 제사장들과 장로들의 말을 다 고했습니다(23). 그러자 성도들은 일심으로 하나님께 큰 소리로 기도했습니다. “대주재여! 천지와 바다와 그 가운데 만유를 지으신 이시오(24).” ‘대주재’는 영어로 Sovereign Lord로, 노예나 주인이나 그 누구도 감히 도전할 수 없는 권세를 지닌 하나님께만 사용되는 단어입니다. 대주재가 되신 하나님은 어떤 분입니까?

첫째는 하나님은 창조주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천지와 만물을 창조하셨습니다. 둘째로 하나님은 계시의 하나님이십니다(25,26). 하나님은 일찍이 시편 2편에서 다윗의 입을 의탁하셔서 이방 사람들이 소동하고, 동족이 헛된 일을 도모하고, 임금들과 통치자들이 일어나 주님의 기름 부은 메시야를 대적하고, 온 세상이 메시야를 대적할 것을 예언하셨습니다. 성경의 예언대로 온 세상이 메시야를 반대하고, 하나님의 복음을 대적하였습니다. 셋째로 하나님은 역사의 하나님이십니다. 27, 28절을 보겠습니다. “과연 헤롯과 본디오 빌라도는 이방인과 이스라엘 백성과 합동하여 하나님의 기름 부으신 거룩한 종 예수를 거스려 하나님의 권능과 뜻대로 이루려고 예정하신 그것을 행하려고 이 성에 모였나이다.” 헤롯과 대적자들, 이방인들과 유대인들의 핍박이 오히려 하나님의 정하신 뜻이며 그것을 통하여 하나님의 뜻이 성취되어 나가십니다. 이 세상에 하나님의 능력과 권능 밖에서 이루어지는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뜻 안에 있습니다. 핍박까지도 하나님의 권능과 능력 안에 있습니다. 이를 통해 복음이 전파됩니다. 초대 성도들은 모든 것이 하나님의 능력과 권능 안에서 이루어지고 있음을 믿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어떤 핍박과 실패 속에서도 좌절하거나 실의에 빠지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 속에서 이루어지고 있음을 알지 못하여 좀 어려운 일이 생기면 ‘하나님께서 왜 이런 시련을 주시고 고통을 주시느냐’고 원망하고 불평하고 실의와 좌절에 잘 빠지곤 합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고난을 당할 때 하나님의 권능과 뜻대로 이루어지고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나의 모든 삶의 영역과 세상 모든 역사는 하나님의 능력과 뜻대로 이루어지고 있음을 믿고 하나님께 감사하고 하나님을 찬양하시기 바랍니다. 지금 내가 주님의 복음을 전하다가 잠시 고난을 당할 때에 예수님의 십자가의 고난에 참예하고 있음을 아시고 감사하십시오. 사도 바울은 골로새서 1:24에서 “우리가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 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고 고백했습니다. 우리가 십자가의 고난의 의미에 동참하는 것이 얼마나 귀한가, 높은 의미의 가치를 생각한다면 주와 복음을 위하여 자존심 상하는 정도야 능히 참을 수 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 다 같이 기도하였습니다. 29,30절을 보겠습니다. “주여 이제도 저희의 위협함을 하감하옵시고 또 종들로 하여금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게 하여 주옵시며 손을 내밀어 병을 낫게 하옵시고 표적과 기사가 거룩한 종 예수의 이름으로 이루어지게 하옵소서 하더라.” 그들의 기도 내용은 참으로 아름답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다시 복음을 전하다가는 끌려가 매를 맞게 됩니다. 그러나 그들은 고난을 면하게 해달라고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우리 같으면 어떻게 기도하겠습니까? “하나님, 우리에게 큰 능력을 주셔서 저 핍박을 하는 저들을 소멸하여 주소서. 우리의 핍박을 면케 하여 주소서. 좋은 환경으로 바꾸어 주소서” 할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환경을 변화시켜 달라고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핍박이 없게 해달가고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복음을 전할 수 있는 좋은 환경을 달라고 기도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들은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에 대해 기도하였습니다. 세상이 달라지기를 바라지 않고 그 상황에서 할 일이 무엇인가를 기도하였습니다. 그들은 사도들에게 담대하게 해달라고 기도했습니다. 핍박을 겁내지 않는 용기를 주시도록 기도하였습니다. 그런 후에 담대하게 기탄없이 복음을 전할 수 있도록 기도하였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복음을 효과적으로 전할 수 있도록 표적을 주시도록 기도하였습니다. 표적과 기사가 거룩한 예수의 이름으로 이루어지게 해달라고 기도했습니다.

그때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31절을 보겠습니다. “빌기를 다하매 모인 곳이 진동하더니 무리가 다 성령이 충만하여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니라.” 예수 이름으로 기도함에 거기 모인 모든 사람이 성령 충만함을 받았습니다. 성령 충만하게 되자 그리스도의 역사의식과 그리스도께 대한 지식이 분명해졌습니다. 자기의 인식과 사명의식이 더욱더 분명해졌습니다. 공동체 의식이 있었습니다.

이를 볼 때 성령 충만은 무아지경이나 엑스타시가 아닙니다. 성령 충만은 복음을 열정적으로 전하도록 하는데 있습니다. 우리가 성령 충만하여 각 마을마다 복음을 전하여 배가의 역사를 이루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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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학마을교회

                                    Tiananmen Square protests, China Democracy, 天安門 天安门 法輪功 李洪志 Free Tibet 劉曉波, 热比娅·卡德尔, 熱比婭·卡德爾