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룩한 나그네

조회 수 3410 추천 수 0 2012.07.11 06:14:09
히브리서 11:8-16(요절 11:13)

거룩한 나그네

“이 사람들은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라 증거하였으니(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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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작품을 보면 나그네라는 주제로 쓴 시들이 많습니다. 우리가 많이 애송하는 시인 박목월의 나그네라는 시가 있고, 겨울 나그네를 주제로 한 영화도 있고, 인생은 나그네길이라는 유행가 가사도 있습니다. 이처럼 사람들은 인생을 나그네로 생각합니다. 히브리서 저자 또한 역대의 신앙의 거장들을 일컬어서 나그네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사도 베드로는 믿는 우리를 일컬어서 나그네라고 불렀습니다. 그런데 성경에서 말하는 나그네는 보통 우리가 말하는 여행자가 아니라 순례자라는 뜻입니다. 순례자는 보통 유랑자나 방랑자와는 다릅니다. 그들은 목적이 있는 여행자이며 특히 거룩한 목적 종교적 목적을 가지고 성지를 순례하는 여행자입니다. 이슬람은 일생에 반드시 한번은 메카를 순례하여야 합니다. 우리 성도들 또한 이스라엘을 중심한 성지를 순례합니다. 믿는 사람들은 마치 순례자와 같습니다. 순례자가 거룩한 땅을 순례하는 것처럼 믿는 우리는 거룩한 목적을 가지고 거룩한 목표를 향하여 나아가는 순례자로서의 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은 모두가 거룩한 목적을 가지고 거룩한 목표를 향하여 나가는 거룩한 순례자들입니다.

야곱은 나이 들어 하나님 나라에 갈 때쯤하여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 나그네 길의 세월이 일백삼십 년이니이다(창47:9).” 야곱은 형 에서를 피해 밧단아람으로 가서 20년 동안 4명의 아내들과 외삼촌으로부터 헤아릴 수 없는 훈련을 받았습니다. 그는 고향으로 돌아가는 길에 얍복강가에서 진땀나는 투쟁을 했습니다. 그는 세겜에서 외동딸이 성폭행 당하는 아픔을 겪어야 했고, 14년 동안 사랑하여 얻은 아내 라헬이 막내아들 베냐민을 해산하다가 죽는 것을 보아야 했고, 사랑하는 요셉을 잃고 20년을 가슴에 묻고 지내야 하는 고통도 겪기도 했습니다. 그는 그동안 제대로 정착하지 못하고 이곳저곳을 전전해야 했습니다. 그는 130년간 이런 저런 풍파를 겪고 황혼에 접어들자 ‘인생은 나그네’라고 깨달았습니다.

나그네의 특징 중 하나는 빈손으로 와서 빈손으로 가는 것이요 또 다른 하나는 돌아갈 고향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그네는 할 수만 있으면 짐을 가볍게 합니다. 여행가방이 무거운 사람은 아마추어 나그네입니다. 반면에 짐이 가벼운 사람은 프로 나그네입니다. 과거의 야곱은 좀 더 얻고자 다른 사람과 경쟁하고 다투고 상처를 주는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이제 야곱이 돌아가야 할 하늘나라의 본향을 사모하게 되었을 때에 세상 것에 집착하지 않았습니다. 무거운 여행가방을 내려놓았습니다. 이처럼 그가 하늘나라의 산 소망을 사모하고 빈손으로 와서 빈손으로 돌아가는 나그네라고 생각하는 순간 가치관이 달라지고 삶이 달라졌습니다.

미네르바 부엉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미네르바는 로마의 지혜의 여신입니다. 지혜의 여신인 미네르바는 부엉이를 좋아하여 항상 부엉이를 데리고 다닌다고 하는데, 독일의 철학자 헤겔이 법철학에서 미네르바 부엉이는 황혼이 짚어지자 날기 시작한다는 데서 미네로바 부엉이란 용어가 나왔습니다. 이 말은 이성적인 철학이나 진리에 대한 인식은 일이 다 끝난 무렵에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무슨 일을 하다가 한참 후에야 비로소 깨닫게 된다는 뜻입니다. 인간의 삶도 미네르바의 부엉이와 같습니다. 야곱도 말년에 자신의 삶을 나그네 인생이라고 고백하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저와 여러분은 젊은 나이에 아, 인생은 나그네, 거룩한 순례자임을 알게 되었으니 얼마나 행복한 일입니까?

오늘 저와 여러분이 거룩한 순례자의 삶이 어떠해야 하는가를 배울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첫째, 뒤로 돌아가서는 되지 않습니다(히11:13-16)

히브리서 11장 13-16절을 보면 믿음의 조상들은 나그네 삶이었음을 전하고 있습니다. 13절을 보겠습니다.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라 증거하였으니” ‘이 사람들’ 이란 아브라함, 이삭, 야곱을 말합니다. 이들은 모두 믿음으로 살다가 죽었습니다. 그들은 이 땅에서 외국인과 나그네로 살았습니다. 아브라함은 큰 희망을 가지고 약속의 땅 가나안에 도착했습니다.

그런데 막상 가보니 기골이 장대한 가나안 원주민들이 살고 있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처음부터 기가 죽고,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할 수 있었습니다. 가나안 땅은 약속의 땅이지만 아브라함에게는 시민권도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그에게 발붙일 만큼의 유업도 주시지 않았습니다(행7:5). 그러나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약속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고 약속의 땅에서 외국인과 나그네로 살았습니다. 가나안은 각종 우상이 난무하였습니다. 미의 여신인 비너스와 물질의 신인 맘몬이 홍수를 이루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가나안 문화에 동화되지 않았습니다.

오늘날 많은 크리스천들이 세상에 동화되어 살아갑니다. 교회에서는 크리스천이지만 세상에서는 크리스천의 냄새가 나지 않습니다. 세상에 나가면 신앙 고백이 없는 회색신자, 박쥐신자로 살아갑니다. 그러나 믿음의 거장들은 세상에 동화되지 않았습니다. 믿음의 거장들은 묵묵히 하나님 나라를 향해 거룩한 순례자의 삶을 살았습니다. 믿음의 거장들은 과거 나온 본향을 생각하고 돌아가지 않았습니다.

15절을 보겠습니다. “저희가 나온바 본향을 생각하였다면 돌아갈 기회가 있었으려니와” 사실 믿음의 조상들의 순례자의 삶이 말처럼 그렇게 낭만적인 삶이 아니었습니다. 남모르는 아픔과 고통이 있었습니다. 희생과 헌신이 요구되었습니다. 때로는 동료들로부터의 소외와 오해, 그리고 많은 불이익을 당하기도 했습니다. 자기를 부인해야 하며, 자기 십자가를 져야 했습니다. 그리고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아야 했습니다. 죄와 선을 긋고 거룩한 삶을 살아야 했습니다. 이 때 ‘내가 무엇 때문에 이 고생을 해’ 하며 과거에 세상에서 즐기던 삶으로 돌아갈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정든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뒤로 돌아가지 않았습니다. 그는 하나님이 지시하신 약속의 땅에 뿌리를 내렸고, 뼈를 묻었습니다. 이삭과 야곱에게도 약속의 땅을 떠나지 못하게 했습니다. 그때 그들은 믿음의 조상, 믿음의 거장들이 될 수 있었습니다.

왜 그러했습니까? 이는 그들이 더 나은 본향을 사모했기 때문입니다. 16a절을 보겠습니다. “저희가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사모’라는 말은 간절히 바라고 사랑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더 나은 본향입니다. 이 세상 그 어떤 것과 비교할 수 없는 나라입니다. 이 세상 나라보다 더 아름답고, 더 고귀하고, 더 가치가 있습니다. 그들은 기쁠 때나, 슬플 때나, 외로울 때나, 고통스러울 때나, 일이 잘 될 때나, 안 될 때나, 더 나은 본향, 하나님 나라를 사랑하고 바랐습니다.

이 때 그는 세상의 좋은 것에 연연하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물질주의와 쾌락주의와 상대주의를 극복할 수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미와 물질을 최고의 가치로 생각합니다. 여기에 행복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아파트 평수를 넓히고 성형 수술을 합니다. 메이커 있는 옷을 입습니다. 그렇지 못한 사람들은 짝퉁이라도 입습니다. 그러나 진정한 행복이 이런데 있지 않습니다. 행복은 영원한 하나님 나라를 소망하며 살아가는데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의 그 지긋지긋한 노예 생활을 청산하고 젖과 꿀이 흐르는 거룩한 순례의 길을 떠났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이끌어내어 홍해를 건너게 하시고 광야에서 먹을 것을 주시고 마실 물을 주시고 거처할 장막까지도 예비하셨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광야 생활이 불편하다고 하나님을 원망하고 모세를 원망했습니다. 그들은 더 이상 고생하면서 순례의 길을 걷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애굽으로 다시 돌아가고자 했습니다.

이 때 어떻게 되었습니까? 민수기 14장을 보면 그들 중 20세 이상 모든 자들은 모두 광야에서 죽고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소돔과 고모라가 죄악으로 인해 멸망 받을 때 하나님은 롯의 아내에게 은혜를 베푸셔서 구원의 손길을 펴시고 절대로 뒤를 돌아보지 말고 앞으로 달려가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녀는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뒤를 돌아보았습니다. ‘돌아보았다’는 것은 과거 즐기던 세상에 대한 미련 때문에 돌아가고자 했음을 말해줍니다. 이 때 롯의 아내는 소금기둥이 되었습니다.

성경 다음으로 많이 읽히는 요한 번연의 천로역정은 영어로 The Pilgrim's Progress, 순례자의 진로입니다. 천로역정에 기독도와 연약이와 절망이가 장망성을 떠나 천성을 향하여 갑니다. 그런데 연약이와 절망이는 장망성으로 되돌아갑니다. 그러나 기독도는 장망성으로 뒤돌아가지 않고 천성에 도달합니다. 그가 천성을 향하여 가는 도중에 낙담의 늪에 빠지기도 하고, 고난의 산을 만나기도 하고, 괴롭고 여러 시험을 만나지만 순례자의 길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마침내 천성에 도달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수많은 고난과 핍박과 죽음의 위험을 겪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끝까지 순례자의 길을 걸었습니다. 그는 지금의 고난이 장차 올 하나님 나라의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음을 믿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하나님 나라를 향한 소망으로 불타이었습니다. 바울은 아그립바 왕 앞에서 심문을 받을 때 “아그립바 왕이여 이 소망을 인하여 내가 유대인들에게 송사를 받는 것이니이다(행26:7b)”라고 했습니다. ‘이 소망’ 은 곧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예수 그리스도와 그를 통해 이루어질 하나님 나라를 말합니다. 사도 바울은 ‘이 소망’을 생각할 때 그의 심령은 벅찬 감격으로 충만했습니다. 이 때 그는 하나님의 단에 자신의 몸을 드릴 수 있었습니다.

우리가 영원하고 아름다운 하나님 나라를 소망할 때 어떤 어려움과 고난과 핍박도 능히 이겨낼 수 있습니다. 세상에 매이지 않고 거룩한 순례자의 길을 걸을 수 있습니다. 자신의 청춘과 물질, 땀과 눈물과 진심을 하나님께 드릴 수 있습니다. 피해의식에 사로잡히지 않고, 좌절과 절망을 극복할 수 있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우리가 뒤로 물러가 침륜에 빠질 자가 아니요, 오직 영혼을 구원함에 이르는 믿음을 가진 자니라(히10:39)”고 했습니다. 뒤로 물러나면 죄악에 빠집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세상에 한 눈 팔지 말고 오직 하나님 나라를 향해 한 걸음, 한 걸음 거룩한 순례자의 길을 가야 합니다.

♬나의 말엔 주가 주신 진리로 나의 눈에 주의 눈물 채워 주소서. 내 입술에 찬양의 향기가 두 손에는 주를 닮은 섬김이 나의 삶에 주의 흔적 남게 하소서. 하나님의 사랑이 영원히 함께 하리 십자가의 길을 걷는 자에게 순교자의 삶을 사는 이에게. 조롱하는 소리와 세상 유혹 속에도 주의 순결한 신부가 되리라. 내 생명 주님께 드리리. 하나님의 사랑이 영원히 함께하리 십자가의 길을 걷는 자에게 순교자의 삶을 사는 이에게. 조롱하는 소리와 세상유혹 속에도 주의 순결한 신부가 되리라. 내 생명 주님께 드리리.♬

둘째, 육체의 정욕을 제어해야 합니다(벧전 1:1,2, 2:11).

베드로전서 2장 11절을 읽겠습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나그네와 행인 같은 너희를 권하노니 영혼을 거스려 싸우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 베드로는 신자를 ‘나그네와 행인’ 같다고 했습니다. 베드로는 베드로전서 1장 1b,2절에서도 신자들을 ‘흩어진 나그네’라고 불렀습니다. 나그네는 영어로 stranger, 이방인이란 뜻입니다.

‘이방인’이란 원주민이 아닌 사람을 가리킵니다. 원주민이 볼 때 이방인은 이상하게 보입니다. 이방인은 피부 색깔도 다르고, 생활양식도 다르고, 언어도 다르고, 옷차림도 다르기 때문입니다. 이방인은 원주민과 같은 삶을 살 수 없는, 다를 수밖에 없는 사람입니다. 이처럼 세상 사람들에게 비친 성도들의 모습은 이상하기 그지없습니다. 주일날 세상 사람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자기 삶을 즐기기 위해 산과 바다로 떠납니다. 그런데 성도들은 교회로 예배를 드리기 위해 옵니다. 세상 사람들은 시간과 물질과 재능을 자기를 위해 쓰지만 성도들은 하나님을 위해 씁니다. 세상 사람들은 옷차림도 아주 야합니다. 그러나 성도들은 경건한 옷차림을 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감정과 욕심과 자기가 원하는 대로 살지만 우리는 말씀을 좇아 삽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사명의 십자가를 사랑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섬김 받기 위하여 높아지고자 하지만 우리는 주고 섬기기 위하여 높아지고자 합니다. 말에 있어서도 다릅니다. 세상 사람들의 주제는 술, 여자, 돈 등입니다. 그러나 성도들이 모이면 예수님, 비전, 가치관, 사명, 세계선교 등 고상한 말을 합니다.

성도는 무엇인가 세상 사람들과 다른 삶을 삽니다. 세상 사람들과 다른 것이 없다면 이는 정말 이상한 사람, 성도라 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영혼을 거스려 싸우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고 했습니다. 영혼은 속사람, 다시 말하여 새로운 속성을 말합니다. 우리가 어머니의 배속에서 태어난 이후부터 옛 사람의 속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반면에 우리가 예수님을 믿으면 거듭났기 때문에 새로운 속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육체의 정욕은 옛 속성입니다. 옛 속성은 자기 자신을 즐겁게 하는 것을 찾습니다. 반면에 하나님의 속성, 새로운 속성은 우리를 통해 흘러넘치는 하나님의 사랑을 찾습니다. 옛 속성은 마치 중력과 같이 매우 힘이 있고, 쉬지 않고 자기에게로 끌어당깁니다.

과거 우리의 삶이 어떠했습니까? 첫째로 우리는 음란하였고, 정욕을 좇아 살았고, 술 취하고, 방탕과 우상을 숭배했습니다. 베드로전서 4장 3절을 보겠습니다. “너희가 음란과 정욕과 술취함과 방탕과 연락과 무법한 우상숭배를 하여 이방인의 뜻을 좇아 행한 것이 지나간 때가 족하도다.” 우상 숭배는 단지 사신(邪神)에게 절하는 것만이 아닙니다. 골로새서 3장 5절을 보면 탐심은 우상숭배라고 했습니다. 사회학자의 분석에 의하면 1950년대 필요한 생필품은 72가지였고 절대 필요한 필수품은 18가지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2000년대를 살고 있는 우리의 생필품은 500가지 이상이고 꼭 필요한 물품은 50가지라고 합니다. 물질물명이 발달할수록 탐심이 우리를 자극하여 필요치 않은 것까지도 소유하고자 발버둥을 칩니다. 프로 여행자와 아마추어 여행자의 차이점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가방을 보면 압니다. 프로는 가방이 가볍고 아마추어는 가방의 부피가 큽니다.

우리는 언젠가는 반드시 이 땅을 떠나 본향인 하나님의 품안으로 돌아가야 할 여행자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세상에 살면서 될 수 있는 대로 가볍게 사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과거 배(胃)를 섬기는 배신자였습니다. 하나님보다 돈을 사랑하였고, 하나님보다 정욕을 더 사랑했습니다. 그 때 우리의 삶이 어떠했습니까? 그 때 우리의 삶은 고통스러웠습니다. 하루하루 시간이 무료했습니다. 너무나 무료하여 다운을 받아 하루 종일 영화를 보고, 값싼 영화관을 전전하고 하루 종일 구들장을 졌습니다. 컴퓨터 게임에 몰두했습니다. 그 시간들은 악몽과 같은 시절이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때로 지난날을 그리워할 때가 있습니다. 그 때 한 번 멋있게 놀아보는 것인데, 이제 언제 멋진 삶을 살아 볼 수 있을까? 마치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하여 광야에서 조금 어려우면 애굽의 종살이하던 시절을 그리워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그 때는 악몽 같은 시절이었습니다. 우리는 그런 시절을 그리워해서는 되지 않습니다.
로마서 6장 20,21절을 보면 과거를 그리워하는 사람들을 향하여 이렇게 말씀합니다. “너희가 죄의 종이 되었을 때에는 의에 대하여 자유하였느니라. 너희가 그 때에 무슨 열매를 얻었느뇨 이제는 너희가 그 일을 부끄러워하나니 이는 그 마지막이 사망임이니라.” 우리는 의에 대하여 자유의 몸이 되었습니다. 다시 말하여 죄의 종으로 살았기 때문에 전혀 의롭고 거룩한 삶에 대해 신경 쓰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그 때의 열매는 뻔한, 사망의 열매를 맺었습니다. 왜냐하면 죄의 삯은 사망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죄를 짓던 삶은 지나간 때로 족합니다.

둘째로 우리는 그들과 똑같이 극한 방탕에 달음질했습니다. 베드로전서 4장 4절을 보겠습니다. “이러므로 너희가 저희와 함께 그런 극한 방탕에 달음질하지 아니하는 것을 저희가 이상히 여겨 비방하나” 우리는 이제 그들의 대열에서 벗어나, 그들의 삶의 방향과 목적과 삶의 스타일과는 다른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이제 그들과 몰려다니며 술을 마시지 않습니다. 그들과 몰려다니며 죄의 낙을 즐기지 않습니다. 그들과 몰려다니며 시간을 허비하지 않습니다. 그들과 함께 몰려다니며 허랑방탕한 삶을 살지 않습니다. 이로 인해 그들은 자기들과 같은 삶의 방식대로 살지 않는다고 우리를 이상히 여겨 비방합니다.

그들의 눈에 비친 우리의 모습이 이상하다는 것입니다. ‘이상히 여기다’는 것은 정상적인 사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사실 불신자들이 믿는 사람들을 볼 때 정상적인 사람이 아닌, 미친 사람들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 또한 저들을 볼 때 미친 사람들로 보입니다. 그들은 정욕에 미친, 잘못 미친 자들이지만 우리는 예수님께 미친, 옳게 미친 자들입니다. 우리가 분명한 삶, 가짜 신자가 아니라 진짜 신자라면 미쳤다는 소리를 들어야 합니다. 미쳤다는 소리 한 번 듣지 않고 예수님을 믿는다면 이는 진짜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사람은 반드시 핍박을 받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어떻게 이 세력을 제어할 수 있습니까? 첫째로 하나님의 말씀을 늘 마음에 두어야 합니다. 시편 저자는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내가 주께 범죄치 아니하려하여 주의 말씀을 내 마음에 두었나이다(119:11).” 주의 말씀은 육체의 정욕을 이길 수 있습니다.

둘째로 성령을 좇아야 합니다. 갈라디아서 5장 16절을 보면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고 했습니다. 성령을 좇으면 영적인 소원이 충만하게 되고, 영적인 소원이 충만하게 되면 육체의 소욕을 이길 수 있습니다.

셋째로 적극적으로 자신의 병기를 하나님께 드려야 합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죄로 너희 죽을 몸에 왕노릇하지 못하게 하여 몸의 사욕을 순종치 말고 또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병기로 죄에게 드리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산 자 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희 지체를 의의 병기로 하나님께 드리라(롬6:12,13).” 주와 복음을 위하여 적극적으로 헌신할 때 육체의 사욕을 제어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거룩한 나그네입니다. 우리는 거룩한 순례자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되를 돌아보지 말고 하나님 나라를 향하여 한걸음 한걸음 걷기를 기도합니다. 옛 속성을 따라 살지 않고 거룩한 나그네로 살기를 기도합니다. 평소에 프로다운 여행자답게 가볍게 사는 법을 배우며 살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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