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물로 씨를 뿌리는 자의 기쁨

조회 수 2662 추천 수 0 2012.07.11 06:15:05
시편 126:1-6, 요절, 126:3

눈물로 씨를 뿌리는 자의 기쁨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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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징계를 받아 바벨론으로 끌려가서 70년 동안 참혹한 노예생활을 해야 하였습니다. 지금은 노예제도가 없기 때문에 노예가 얼마나 천한 신분인지 실감이 나지 않습니다. 노예는 자기가 없습니다. 노예는 이름이 없었습니다. 자기 생각도 있을 수 없고, 자신의 꿈이나 계획을 가질 수 없었습니다. 노예는 자기 소유물이 없었습니다. 노예는 오늘날 공장의 기계나 다를 바 없었습니다. 노예는 사람이 아니라 생산 수단에 불과했습니다. 노예하고 당나귀는 똑같은데, 노예는 말을 할 줄 알고, 당나귀는 말을 하지 못하는 데 있었습니다. 노예시장에 가서 마음에 드는 노예가 있으면 흥정하여 값을 내고 사서 이미 뚫어져 있는 귀에 자신의 이름을 새긴 귀걸이를 달게 되면 그 순간부터 주인의 소유가 되었습니다. 이스라엘이 바벨론에 의해 멸망당하여 포로로 끌려갔을 때에 거기에는 전 세계에서 끌려온 수많은 노예들이 있었습니다. 그 수많은 노예들은 강제로 동원되어 바벨론의 성을 쌓고 궁궐을 건축하였습니다. 유대 노예들이라고 다른 나라의 노예와 다를 바 없었습니다. 이스라엘 노예라고 하여 잘 난 것도 없었습니다. 뛰어난 것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바벨론으로 끌려온 지 70년이 지난 어느 날, 고레스 왕이 이스라엘 노예들에게 고국으로 돌아가라는 뜻밖의 해방 명령을 선포하였습니다. 그 수많은 노예들 중에 오직 유대인들만이 자유인이 되어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라는 것이었습니다. 그 때 그들의 기쁨이 어떠했을까요? 그 때 그들의 심정이 어떠했을까요? 오늘 본문은 유대인들이 바벨론에서 해방되었을 때의 그 기쁨을 노래한 시입니다. 그들은 꿈꾸는 것과 같다고 했습니다. 입에는 웃음이 가득하고, 혀에는 찬양이 저절로 흘러 나왔다고 했습니다. 다른 나라에서 붙들려온 노예들이 부러운 눈초리로 쳐다보면서 여호와께서 큰일을 행하셨다고 했습니다. 이때 그들은 자기도취에 빠지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아직도 남은 자들이 많음을 알고 기도했습니다. 더 나아가 눈물로 씨를 뿌리는 새로운 생활을 하고자 결심했습니다. 우리는 오늘 말씀을 통해 내 옆에 있는 빈자리는 구원의 자리로 알고 울며 씨를 뿌려 기쁨으로 단을 거두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하고 기도합니다.

첫째, 꿈꾸는 것 같았도다(1).

1절을 보겠습니다. “여호와께서 시온의 포로를 돌리실 때에 우리가 꿈꾸는 것 같았도다(1).” 원래 노예는 일정한 몸값을 지불해야 노예의 신분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예루살렘에서 붙들려간 노예들은 아무도 몸값을 지불해 줄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평생 아니 후손들도 노예로 살다가 죽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니 그들에게 무슨 꿈이 있고 소망이 있었겠습니까? 그들은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노예들의 영가만 부를 뿐이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그 거대한 바벨론 제국이 무너지면서 새로 등장한 고레스 왕이 유대 노예들에게만 해방을 선언했습니다. 그것도 전혀 몸값을 받지 않고 거저 해방을 선언하고 고향,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라고 했습니다. 이런 일은 역사상 일어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사람의 힘으로는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자유인이 되었습니다. 그들은 “이 일은 하나님께서만이 하실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여호와께서 시온의 포로를 돌리셨다고 노래하고 있습니다. 겉으로는 고레스 왕이 한 일이었지만 실제로 하나님이 이 모든 일을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왜 고레스가 유대 노예들이 아무 몸값도 지불하지 않았는데도 그들을 해방시켰는지, 그리고 무엇 때문에 고레스가 그들을 돌려보냈는지 알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이사야는 일찍이 이에 대해 예언을 했습니다. 이사야서 45장 1-3절을 보겠습니다. 하나님께서 고레스에게 유다 백성들의 몸값을 다 지불했다는 것입니다. “나 여호와는 나의 기름 받은 고레스의 오른손을 잡고 열국으로 그 앞에 항복하게 하며 열왕의 허리를 풀며 성 문을 그 앞에 열어서 닫지 못하게 하리라 내가 고레스에게 이르기를 내가 네 앞서 가서 험한 곳을 평탄케 하며 놋 문을 쳐서 부수며 쇠빗장을 꺾고 네게 흑암 중의 보화와 은밀한 곳에 숨은 재물을 주어서 너로 너를 지명하여 부른 자가 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인줄 알게 하리라.” 하나님은 지하창고에 보관된 엄청난 보화와 재물을 이미 고레스에게 유다 노예들의 몸값으로 다 지불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주는 의미가 무엇입니까? 우리는 본래 죄 중에 태어나 죄를 지으며 살던 죄의 노예였습니다. 우리는 죄에게 순종하며 죄의 소욕을 좇아 살았습니다. 오랫동안 죄를 섬겼기 때문에 온 몸에 죄의 습성(근성)이 배어 있었습니다. 스스로의 힘으로는 도저히 이 죄의 속박에서 벗어날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우리를 아시고 친히 우리의 몸값을 지불하셨습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은 나를 죄에서 건져내기 위해 예수님과 사상 최대의 big deal을 하셨습니다. 이로 인해 우리는 죄의 속박에서 벗어나 하나님을 섬기는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거룩한 성령을 충만히 받았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죄로부터 해방되기 위해 또 다른 어떤 값을 지불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는 죄를 사함 받기 위해 고행이나 참 선을 할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십자가에서 모든 죄 값을 지불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십자가 죽으심은 나의 죄를 위한 것임을 믿고 고백하는 순간 모든 죄가 사해집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과거의 죄만이 아니라 미래의 죄까지도 포함합니다. 십자가는 우리의 일부분만을 위한 구원의 십자가가 아닙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완전한 구원이요 영원한 구원의 십자가입니다. 예수님은 다 이루었다고 하셨습니다(요19:30). 예수님의 십자가는 구원의 완성입니다.

그동안 우리는 낮은 자존감으로 늘 괴로워했습니다. 열등감으로 우울한 날을 보냈습니다. 내 자신이 그렇게 밉고 싫을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만나는 순간 내 자신이 소중하고 사랑스럽고 귀하게 느껴졌습니다. 슬픔이 변하여 기쁨으로, 미움이 변하여 사랑으로, 절망이 변하여 희망으로, 두려움이 변하여 승리로, 심판이 변하여 구원으로, 정죄가 변하여 용서로, 운명이 변하여 천명으로 변했습니다. 우리는 거듭난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우리는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우리는 과거의 우리가 아닙니다. 우리의 병든 내면은 치유되었고 온전히 회복되었습니다. 우리는 다 용서받았습니다. 우리는 더 이상 죄의식에 시달릴 필요없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성령께서 우리의 죄를 깨닫게 하시고, 회개하도록 도와주시고, 성결한 삶을 살도록 하십니다. 우리는 이제 주님 안에서 구원을 누리기만 하면 됩니다. 그런데 우리는 하도 오랫동안 죄의 노예로 살았기 때문에 주인 앞에서 자유롭지 못합니다. 자유를 누리지 못하고 행복을 누리지 못하고 기쁨을 누리지 못합니다. 이제 주님 안에서 죄 사함의 기쁨을 누리십시오. 죄로부터 해방된 자유를 누리십시오. 성령 안에서 행복을 누리십시오.

그러면 우리의 미래까지도 구원받았으니 죄를 지어도 되지 않는가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럴 수 없습니다. 로마서 6장 1,2절은 보겠습니다.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 우리가 더 이상 죄를 지어서는 안 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죄에 대해 내가 죽었기 때문입니다. 죽은 사람은 의식이 없습니다. 죽으면 인간관계도 끝나고, 법적인 관계도 중단됩니다. 빚쟁이도 죽은 사람에 대해 빚을 갚으라고 요구하지 않습니다. 검사나 판사도 죽은 사람에게 형을 선고하지 않습니다. 미국에서는 장례행렬의 차량에 대해서만큼은 교통신호의 제약을 주지 않습니다. 죽음은 모든 책임과 지배와 구속으로부터 자유롭게 합니다. 죄에 대해 내가 죽었기 때문에 우리는 더 이상 죄의 지배를 받아서는 되지 않습니다. 주님의 은혜를 헛되이 해서는 되지 않습니다.

둘째, 남방 시내들 같이 돌리소서(2-4)

사람이 기분이 좋으면 입을 다물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절로 웃음이 나옵니다. 자기도 모르게 콧노래가 나옵니다. 노예에서 돌아오는 유대 백성들이 그러했습니다. 2a절을 보겠습니다. “그 때에 우리 입에는 웃음이 가득하고 우리 혀에는 찬양이 찼었도다.” 그들이 얼마나 좋았던지 돌아오면서 내내 입을 다물지 못했습니다. 그들의 얼굴에는 웃음이 가득했고, 입에서는 찬양이 흘러 넘쳤습니다. 그들이 왜 그렇게 기뻐했습니까? 왜 그렇게 입이 다물 줄 모르며 찬양이 흘러넘쳤습니까? 노예들에게 자유를 얻는 것보다도 더 기쁜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들이 기뻐하는 것은 아주 당연한 것입니다.

이제 다른 이방인 노예들이 여호와를 찬양하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호와께서 저희를 위하여 대사를 행하셨다 하였도다(2b).” 그 전에는 유대 노예들이나 자기들이나 다 똑같은 노예들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사실 외형적으로 보면 유대 노예들이나 다른 나라의 노예들이나 다를 바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유독 유다 노예들만 해방되는 것을 보면서 생각이 달라졌습니다. 그리고 시온의 노예들에 대해 달리 생각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고레스를 부리는 하나님을 믿으면 자신들도 혹시 자유인이 되지 않을까 기대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들 또한 하나님을 믿고 놀라운 하나님의 은총을 덧입어 해방되는 기쁨을 누리기도 했을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한 가지 비밀을 배우게 됩니다. 믿는 사람은 믿지 않는 사람과 차원이 다르다는 사실입니다. 겉으로 보면 다 똑같아 보입니다. 그러나 믿는 사람이나 믿지 않는 사람이나 다 똑같은 것이 아닙니다. 차원이 다릅니다. 종자가 다릅니다. 한 예로 믿는 사람이나 믿지 않은 사람이나 모두 병이 들어 병원에 입원할 수 있습니다. 믿는 사람이라고 병원에 입원하지 말라는 법 없습니다. 이 때에 다른 사람들이 볼 때 다 똑같은 환자로 보일 것입니다. 그러나 같은 환자이지만 차원이 다른 환자입니다. 예수님 믿고 병원에 입원한 자는 하나님의 사랑의 연단으로 병원에 누워있는 것입니다. 때가 되면 하나님께서 그 모든 고통을 벗기시고 영광스럽게 하십니다. 반면에 예수 믿지 않는 사람은 그저 병이 들어 병실에 누워있을 뿐입니다. 그것은 연단도 아니고 축복도 없습니다. 그러니까 같은 환자로 보면 안됩니다. 하나는 영광의 환자이고 다른 하나는 그냥 병들어 누워있는 환자입니다. 예수님은 나사로가 병들었다는 소식을 들으시고 ‘이 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낼 병’이라고 하셨습니다. 미국의 선교사님들이 비자 문제로 이만저남 고생이 아닙니다. 그러나 선교사님들은 다른 이민을 기다리는 이민자들과 차원이 다른 분들입니다. 하나님께서 선교사님들을 연단하신 후에 때가 되면 영광스럽게 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주님을 사랑하는 모든 자들과 합력하여 선을 이루십니다.

3절을 보겠습니다.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하여 대사를 행하셨으니 우리는 기쁘도다.” 고레스의 도움으로 시온의 노예들이 예루살렘으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이것을 큰 대사(great things)로 보았습니다. 노예가 해방되는 것은 큰 일 중의 큰 일입니다. 우리 또한 구원 받은 것은 우리의 삶 중에 가장 큰 일입니다. 이 세상에 큰 일들이 많지만 이보다 더 큰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러나 내가 구원받은 것으로 끝나서는 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아직도 노예 상태로 사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남방의 시내들 같이 돌려달라고 기도하였습니다. 4절을 보겠습니다. “여호와여 우리의 포로를 남방 시내들 같이 돌리소서” '남방 시내' 평소에는 물이 없어 말라있다가 하늘에서 비가 쏟아지면 금방 물바다로 변했습니다. 그들은 남은 포로들이 남방의 시내들같이 모두가 회복되어 돌아오도록 기도하였습니다. 고레스 왕이 돌려보낸 예루살렘 포로들은 그렇게 많은 숫자가 아니었습니다. 이것은 선발대에 불과했습니다. 이들의 이 기도는 그들의 비전이기도 했습니다.

에스겔은 얼마 있지 않아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후에 성령이 이 땅에 임하여 인종과 피부색을 떠나서 구름같이 하나님께로 몰려올 비전을 보았습니다(겔47:1-12). 성전 문지방에서부터 졸졸 작은 생수가 흘렀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일천척이 되는 곳에 이르러 측량을 해보니 발목까지 찰 정도로 물이 많아졌습니다. 다시 천 자가 되는 곳에서 측량을 해보니 무릎까지 차올랐습니다. 그리고 다시 또 측량을 해보니 물이 허리에까지 차고, 다음에는 강이 되어서 헤엄을 칠 정도로 물이 가득 찼습니다. 이것이 바로 믿는 사람들을 통한 성령의 역사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무한한 비전과 소망을 약속하셨습니다. 성서한국은 경한 일입니다. 더 나아가 이방의 빛으로 삼아 만백성에게 복음을 전하여 세계 곳곳의 원방과 열왕들이 몰려올 비전을 보여 주셨습니다. 일찍이 성경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많은 백성이 가며 이르기를 오라 우리가 여호와의 산에 오르며 야곱의 하나님의 전에 이르자 그가 그 도로 우리에게 가르치실 것이라 우리가 그 길로 행하리라 하리니 이는 율법이 시온에서부터 나올 것이요 여호와의 말씀이 예루살렘에서부터 나올 것임이니라(사2:3).” 하나님은 우리에게 우리 손으로 우리의 세대에 성서한국은 경한 일이요 통일한국과 세계 복음화의 비전을 주셨습니다. 이것은 우리의 기도제목이자 우리의 비전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꿈을 이루시라고 믿습니다.

셋째, 눈물로 씨를 뿌리는 자는(5,6)

그러면 우리가 비전만 붙들고 꿈만 꾸면 됩니까? 바벨론에서 돌아온 유다 포로들은 이제 다시 돌아왔으니 이제 고향 땅에서 두 다리 뻣고 지냈습니까? 4,5절을 읽겠습니다.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자는 정녕 기쁨으로 그 단을 가지고 돌아오리로다.” 그들은 눈물로 씨를 뿌렸습니다. 예루살렘은 오랫동안 방치되어 폐허가 되다 싶었습니다. 경작하기란 거의 불가능했습니다. 황무지에 씨를 뿌린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입니까요? 미국의 1세대 개척자들은 50세를 넘기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버려진 땅을 개간하고 개척하기가 너무 힘들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만큼 버려진 땅에 씨를 뿌린다는 것은 어렵고 힘든 일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렸습니다. 눈물로 씨를 뿌릴 때에 반드시 기쁨으로 추수하게 될 것을 확신했습니다. 그들은 행운을 믿지 않고 공의로우신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행운과 행복의 차이가 무엇입니까? 행운은 수고 없이 우연히 거저 얻어지는 것이고, 행복은 애쓰고 수고하고 눈물을 흘리는 데서 얻어지는 것입니다. 사도 야고보가 웃음을 애통으로, 너희 즐거움을 근심으로 바꾸라고 한 것도 여기에 있습니다(약4:9).

사도 바울은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고 했습니다(갈6:7). 우리 속담에 콩 심은 곳에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이 난다고 했습니다. 참된 행복은 그 씨를 심는 데서부터 시작됩니다. 불행의 씨를 심어 불행을 거두고, 행복의 씨를 심어 행복의 결실을 거둡니다. 과거의 모든 행동이 지금의 열매인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진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얻으리라(갈6:8)”고 했습니다. 자기의 육체를 위해 심는 자는 육체에게서 멸망을 거둡니다. 육체의 정욕을 심는 자는 반드시 정욕의 열매를 맺습니다. 원망과 미움, 불평하는 사람들은 원망과 미움과 불평의 열매를 거두고 또 세상 친구들과 어울리는 사람들은 그런 열매를 맺습니다. 그러나 성령을 위해 심는 자는 영생을 얻습니다. 감사를 심고 축복을 심고 기도를 심고 사랑하고 칭찬을 심으면 감사의 열매, 축복의 열매, 기도의 열매, 사랑과 칭찬의 열매가 맺힙니다. 이러기 위해서는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고, 위엣 것을 사모해야 합니다. 이처럼 무엇으로 심든지 반드시 과거에 심은 것은 오늘 거두게 되고, 오늘 심는 것은 내일 거두게 되고, 이생에 심는 것은 내세에서 거두게 됩니다. 그러므로 좋은 종자를 잘 심어야 합니다. 종자가 나쁘면 나쁜 열매를 맺습니다. 영국에 이런 속담이 있습니다. “생각을 심어 행동을 거두고, 행동을 심어 습관을 거두라. 습관을 심어 성결을 거두고, 성결을 심어 운명을 거두라.” 성경은 말씀합니다.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비로부터 아들에게로 삼사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출20:5,6).”

우리가 선을 행할 때 조심할 것은 낙심하지 않는 것입니다(갈6:9,10). 우리가 열심히 성경을 공부하고, 전도해도 뚜렷한 열매가 없을 때 맥이 빠집니다. 그러나 낙심치 않고 선을 행할 때 언젠가는 반드시 열매를 맺습니다. 낙심치 않고 선을 행할 때에 당장은 누가 알아주지 않지만 언젠가는 알려지게 마련입니다. 古語에 ‘德不孤 必有隣-덕은 외롭지 않고 반드시 이웃이 있다’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의인이 버림을 당하거나 그 자손이 걸식함을 보지 못하였도다(시37:25).”

우리 주위를 보면 황무지와 같습니다. 캠퍼스는 영적으로 황무합니다. 가정은 어떠합니까? 이혼 가정이 늘어나고 그로 인해 복합가정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직장 또한 황무합니다. 우리는 이제 어떻게 해야 합니까? 나 혼자 구원 받은 것으로 만족해야 합니까? 우리는 눈물로 씨를 뿌려야 합니다. 황무지에 복음을 심는다는 것은 어렵습니다. 제가 25년 전, 인하대에 복음을 전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웠는지 모릅니다. 어떤 형제는 인천은 수도권이기 때문에 대전과 다르다며 일찍 대전으로 짐 싸들고 내려가라고 했습니다. 그런 상황에도 저희 부부는 매일 캠퍼스에 나아가 복음의 씨를 뿌렸습니다. 울면서 씨를 뿌렸습니다. 기쁨으로 단을 거두리라는 믿음의 확신을 갖고 말입니다. 그런데 당장 무엇이 잡히지 않을 때에 한 형제가 나에게 충고한 그 말이 생각나곤 했습니다. 그러나 낙심치 않고 복음의 씨를 뿌렸을 때에 많은 주님의 제자들이 세워졌습니다. 우리가 황무지와 같은 캠퍼스와 직장과 가정에 울면서 씨를 뿌릴 때에 기쁨으로 단을 거두리라 믿습니다. 지금 당장 열매가 보이지 않을지라도 끝까지 참고 견디며 내일을 위해 씨를 뿌립시다. 반드시 기쁨으로 열매를 거두게 될 것입니다.

찬양하겠습니다. ♬ 이 땅의 황무함을 보소서 하늘의 하나님 긍휼을 베푸시는 주여 우리의 죄악용서 하소서 이땅 고쳐 주소서 이제 우리 모두 하나 되어 이 땅의 무너진 기초를 다시 쌓을 때 우리의 우상들을 태우실 성령의불 임하소서 부흥의 불길 타오르게 하소서 진리의 말씀 이 땅 새롭게 하소서 은혜의 강물 타오르게 하소서 성령의 바람 이제 불어 와 오--주의 영광 가득한 새날 주소서 오--주님 나라 이 땅에 임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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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ananmen Square protests, China Democracy, 天安門 天安门 法輪功 李洪志 Free Tibet 劉曉波, 热比娅·卡德尔, 熱比婭·卡德爾