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으로 악을 이기라

조회 수 2522 추천 수 0 2012.07.11 06:16:29
로마서 12:14-21, 요절 12:21)

선으로 악을 이기라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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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는 도시사회, 대중문화 사회, 지식정보화시대입니다. 이런 시대의 특징은 한 마디로 가치관 혼란, 인간소외 사회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open society 가 closed society 사회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다보니 이웃과 이웃에 대해, 너와 나 사이에 무관심하게 되고, 사랑의 교제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또한 별별 사람들을 다 만나게 됩니다. 나를 반기고, 나를 사랑하고, 나를 귀하게 여기는 사람이 있습니다. 반면에 나를 힘들게 하는 사람도 있게 마련입니다. 나를 핍박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내가 즐거울 때 함께 즐거워하고, 내가 슬퍼할 때 함께 슬퍼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마음이 교만하지 않고 겸손한 사람도 있습니다. 반면에 자기 잘난체하는 교만한 사람도 있습니다. 선을 오히려 악으로 갚는 사람도 있습니다. 은혜를 헌신짝처럼 버리는 사람도 있습니다. 때론 원수 같은 사람도 있습니다. 이처럼 좋은 이웃이 있는 반면에 나쁜 이웃이 있게 마련입니다. 사랑으로 대하는 사람, 웃는 모습으로 대하는 사람, 이런 좋은 이웃과는 좋은 관계를 맺어나간다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문제는 악의를 품고 나를 힘들게 히는 사람, 나를 핍박하는 사람, 교만하고 거만한 사람과 원만한 관계를 맺고 산다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사람들의 한결 같은 마음은 웃는 자에게는 웃는 모습으로 대하고, 미워하는 자에게는 미움으로 대하고, 빼앗기면 빼앗아버리고 싶습니다. 속담에 “오는 말이 고와야 가는 말이 곱다”는 말처럼 우리의 마음은 상대적입니다. 그래도 이 정도면 그래도 괜찮습니다. “되로 받고 말로 준다”는 말처럼 보복하고자 하는 심리가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모습이요 사회의 보편적인 현상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이웃에 대하여 어떻게 대하라고 합니까? 오늘 말씀을 통해 이웃에 대한 바른 자세를 갖기를 바랍니다.

첫째, 핍박하는 자를 축복하라(14).

14절을 보겠습니다.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축복하라 축복하고 저주하지 말라.” 하나님은 누구에게나 보복심리가 있음을 아시고 일찍이 “이는 이로, 눈은 눈으로”라는 계명을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말씀을 주실 당시의 사회상은 이를 상하게 했으면 이만 상하게 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눈을 상하게 했으면 눈만 상하게 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 이상의 보복이 자행되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악을 더 큰 악으로 갚지 말도록 하기 위하여 ‘이는 이’, ‘눈은 눈’으로 복수의 한계를 정해놓으신 것입니다. 이게 구약 시대의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이요 은혜입니다.

우리 속담에 “여자가 한을 품으면 오뉴월에도 서리가 내린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리고 ‘恨 풀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우리 문화를 ‘恨’의 문화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恨을 풀 힘이 없으면 노래를 불러서라도 그 한을 풀려고 했다는 것입니다. 그 예로 아리랑을 들고 있습니다. 아리랑의 내용을 보면 “아리랑, 아리랑, 아나리요. 아리랑 고개 넘어간다. 나를 버리고 가시는 님 십리도 못가서 발병 난다”입니다. 이 말은 “나를 버리고 가려면 가라 좋다, 그러나 가기는 가지만 십리도 못가서 발목이 부러지어 넘어질 것이다, 나를 버리고 잘 되는가 보라”는 보복심리가 담겨져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남북이 만나면 꼭 이 아리랑을 부릅니다. 그러니 관계가 좋아질 리가 없습니다.

미국은 어떠합니까? 미국의 서부 활극을 보면 반드시 복수를 합니다. 호머의 오딧세이와 일리아드는 고전 중의 고전입니다. 이것을 읽지 않으면 헬라 문화, 아니 서구 문학의 세계를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 내용은 보복의 악순환을 그린 작품입니다. 보복에서 이긴 영웅들의 이야기와 그들을 찬양하는 내용입니다. 제 1차 대전과 2차 대전의 발발의 원인이 뭐입니까? 모두가 보복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인류역사는 보복으로 점철되어 있습니다. 당하면 어떤 모양으로든지 보복하고자 하는 게 인간의 보편적인 모습이요 우리의 모습, 나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핍박하는 자를 저주하지 말고 축복하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에서 핍박은 고난과 다릅니다. 핍박은 아주 고의적으로, 의도적으로 괴롭히는, 악의를 가지고 괴롭히는 것을 말합니다. 악의를 가지고 나를 핍박하고, 악한 의도를 가지고 나를 괴롭히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성경은 그런 사람을 저주하지 말고 오히려 축복하라고 하였습니다. 나를 의도적으로 적대감을 가지고 핍박하는 사람을 미워하지 않는 것만도 어려운데, 그런 자를 위해 축복하라고 하십니다. 이는 주님께서는 세상의 방법인 보복의 원리로 살지 말고, 하나님의 방법인 다른 사람에 대한 복을 비는 축복의 원리를 가지고 살아가라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10장을 보면 예수님께서 70명의 제자들을 마을로 전도 차 보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어느 집에 가던지 무조건 먼저 그 집에 복을 빌라고 했습니다. 다시 말해 이 집이 망할 집인지, 복을 받을 집인지 따지지 말고 성도가 해야 할 사명은 가자마자 복을 주시도록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믿는 사람들은 어떤 집을 방문하든지 먼저 잠깐 묵상기도를 합니다. 그 때 여러분은 무슨 기도를 합니까? “내가 이 집에 무슨 부탁을 하려고 왔는데 잘 들어주게 하소서”하고 기도하지는 않습니까? 우리는 먼저 무조건 복을 주시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이 집에 복을 내려 주십시오. 이 집이 예수님을 잘 믿는 가정이 되게 해 주십시오. 자녀들에게 복을 내려 주십시오. 필요한 모든 것을 날마다 풍족하게 채워주십시오.” 무디 목사님의 전도 성공의 비결도 여기에 있었다고 합니다. 그는 가는 곳마다 먼저 무조건 축복을 했다고 합니다. 어린이나 어른이나 술주정뱅이나 누구를 만나든지 축복기도부터 해주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축복하는 대로 사람들이 변화하더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세상에 계실 때 어떻게 하셨습니까? 예수님은 핍박을 받을 때에 결코 저주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돌아가시기 전에 핍박하는 그들을 위해 기도하시고, 죄를 용서해주시고, 축복해주셨습니다. “욕을 받으시되 대신 욕하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받으시되 위협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는 자에게 부탁하시며(벧전2:23)” 베드로 사도는 그의 서신에서 “악을 악으로, 욕을 욕으로 갚지 말고 도리어 복을 빌라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입었으니 이는 복을 유업으로 받게 하려 하심이라(벧전3:9)“고 했습니다. 여러분은 지금 핍박하는 사람을 축복을 합니까? 아니면 저주합니까? 성경은 한 입으로 저주와 찬송이 나오는 것이 마땅치 않다고 하셨습니다(약3:9,10). 저주는 하면 할수록 저주하는 사람에게 돌아갑니다. 우리 자신을 위해서라도 축복을 해야 됩니다(눅10:5,6).

하나님은 성도들의 입술에 권능을 부여하셨습니다. 우리가 고백하는 한마디, 기도하는 한 마디에 놀라운 권능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너희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라”고 했습니다. 우리의 한마디가 실제로 하늘나라에서 능력으로 나타납니다. 그런데 문제는 전도할 때나, 모른 사람을 위해 축복은 할 수 있는데, 옆에 있는 사람, 가장 가깝게 동역하는 사람, 마음을 주고 사랑하던 사람과 관계성이 어그러졌을 때 복을 빌어 준다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사실 나쁜 의도로 나를 핍박하고, 악한 의도로 나를 괴롭히고, 힘들게 하고 하는 사람들을 축복하기는 고사하고 용서조차 할 수 없는 것이 우리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핍박하는 사람을 저주하지 말고 축복하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들입니다. 그렇다면 순종하기 쉬운 말씀만 골라서 순종해서는 되지 않습니다. 순종하기 어려운 말씀을 순종하는 것이 제자의 삶입니다.

둘째, 이웃의 즐거움과 슬픔을 함께 하라(15).

15절을 보겠습니다. “즐거워하는 자들로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로 함께 울라.” 이 말은 同苦同樂하라는 것입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슬픔과 고통에 익숙하여 남이 불행한 일을 만나면 마음 아파하고 동정을 잘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즐거워하는 자와 함께 즐거워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속담에 “사촌이 논을 사면 배가 아프다”는 말이 있습니다. 남이 잘되는 것을 볼 수가 없습니다. 이처럼 기쁨을 함께 나눈다는 것은 쉬운 것이 아닙니다.

인류의 최초의 비극이 어디에서 일어났습니까? 동생 아벨이 하나님의 사랑을 받자 그것이 싫은 형인 가인이 동생을 죽이는 데서부터 인류의 비극은 시작되었습니다. 이처럼 우리에게는 다른 사람이 잘 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본성이 있습니다. 그러나 형제 사랑은 다른 사람이 잘 될 때에 마음으로 함께 기뻐하는 것입니다. 예수 잘 믿는다는 것은 기쁠 때 함께 기뻐하고, 슬플 때 함께 슬퍼하는 것입니다. 반가운 사람 만나면 기뻐서 어쩔 줄 몰라 하고, 친구나 성도를 만나면 손을 붙잡고 안아주고 등을 두드려 주고 기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만나기는 만났는데 닭 쫓던 개 지붕 쳐다보듯 멀뚱멀뚱 쳐다보기만 하면 되지 않습니다. 즐거워할 때 즐거워하고, 슬플 때 슬퍼하지 않는 것은 병든 신앙입니다. 무표정, 이것은 병든 신앙의 대표적인 현상입니다. 즐거울 때에 함께 즐거워하고, 슬플 때에 함께 슬퍼할 수 있는 그런 사람이 건강한 사람입니다.

형제 사랑은 칭찬으로 나타납니다. 사람이 다른 사람을 욕하게 되면 세 사람이 나빠집니다. 욕을 듣는 사람, 전해 듣는 사람, 욕하는 사람입니다. 반면에 칭찬하게 되면 듣는 사람이 좋고, 전해 듣는 사람이 좋고, 칭찬하는 사람 또한 좋습니다. 칭찬하는 것 밑천 들지 않습니다. 우리 중에 이웃이 잘 되는 것 때문에 은근히 마음이 고통스럽다면 그 마음을 고치고 이웃과 함께 즐거워하기를 바랍니다.

셋째, 이웃과 겸손하여라(16).

16절을 읽겠습니다. “서로 마음을 같이하며 높은데 마음을 주지 말고 도리어 낮은데 처하여 스스로 지혜 있는 체 말라.” 우리 속에는 나는 너와는 좀 다르다, 스스로 잘 난체 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사람들 앞에서 으스대고 싶은 우월감, 그리고 다른 사람이 그렇게 인정해주기를 바라는 마음이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고 나서도 예수 믿는 사람들끼리도 나는 너희와는 다르다는 생각을 갖기 쉽습니다. 그래서 교만한 사람, 거드름을 피우는 사람을 보면 그냥 볼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주님이 원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은 겸손한 이웃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너는 다 나보다 낫다”, “너는 나보다 훌륭하다”란 겸손한 마음으로 이웃을 대하기를 원하십니다.

사람들이 상처를 받는 것은 “다른 사람을 나보다 훌륭하다, 다른 사람이 나보다 낫다”라는 겸손한 마음을 갖지 못하기 때입니다. 여러분이 언제 상처를 받는지 가만히 생각해 보세요. 겸손한 사람으로부터는 절대로 상처를 받지 않습니다. 우리는 교만한 사람으로부터 상처를 받습니다. 따라서 이웃에 대해 겸손하기를 바랍니다. 겸손한 사람은 배웁니다. 배우니 성장합니다. 성장하니 성숙한 사람이 됩니다. 성숙하니 다른 사람에게 영향을 끼치게 됩니다. 영향을 끼치니 존경을 받게 됩니다.

넷째, 이웃에게 선을 도모하라(17-20).

17,18절을 보겠습니다. “아무에게든지 악으로 악을 갚지 말고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하라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평화하라.” ‘도모’는 의도적인 것입니다. 깊이 생각하는 것입니다. 내가 어떤 형편이 있을지라도 의도적으로 도모하는 것입니다. 또한 성경은 할 수 있거든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평하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사회생활을 하면서 가급적이면 적을 만들지 말라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단서가 있습니다. ‘할 수 있거든’입니다. 아무리 우리가 좋은 관계를 맺고자 해도 잘 안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한계에 부딪칠 때가 있습니다. 바울은 이를 인정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능한 한 좋은 관계를 유지하여 적을 만들지 말라고 하십니다. 이게 그리스도인의 삶의 원리입니다.

구체적으로 선을 도모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보복하지 않는 것입니다. 19,20절을 보겠습니다.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원수를 갚지 말고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우라 그리함으로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리라.” 이 말씀에서 볼 때에 첫째로, 원수 갚는 것은 우리가 할 일이 아니라는 것과, 둘째로,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라, 하나님께서 갚아주시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저주할 권한을 주시지 않았습니다. 저주나 심판은 오직 하나님께만 있습니다. 그러니까 누구도 저주할 권리가 없습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보복하라’, ‘정죄하라’는 말씀이 없습니다. 대신에 ‘사랑하라’, ‘감사하라’, ‘기도하라’, ‘기뻐하라’, ‘칭찬하라’, ‘복음전하라’고 하고 있습니다. 성경 어디에도 ‘정죄하라’, ‘심판하라’, ‘복수하라’는 단어는 없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복수하고, 판단하고, 피를 부르고, 피를 묻혀서는 되지 않습니다.

사회가 시끄럽고, 우리의 내면이 시끄러운 것은 이웃에게 선을 도모하지 않고 서로 판단하고, 서로 복수하고, 서로 정죄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아침부터 저녁까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판단하고 정죄하며 살아갑니까? 지난 한 주간 여러분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판단하고 정죄하였는가를 생각해보세요. 운전하다가 새치기하는 사람을 보며 판단하지는 않았습니까? 출근해서 자기에게 무례하게 행동하는 사람을 판단하지 않았습니까? 자기 마음에 들지 않고, 자기 의견과 맞지 않는다고 매도하고 정죄하지 않았습니까? 어제의 친구가 오늘의 적이 되고, 어제의 친구가 오늘의 정죄와 매도의 대상이 되지는 않았습니까? 우리는 즉결 재판소의 판사들처럼 아침부터 저녁까지 심판자의 자리에 앉아서 남을 판단합니다. 대개 잠못 이루지 못할 때가 언제입니까? “하나님을 어떻게 잘 섬길 수 있을까”, “어떻게 동료를 사랑할 수 있을까”, “어떻게 양들을 잘 도울 수 있을까”, “어떻게 하나님의 뜻과 비전을 섬길 수 있을까”가 아닙니다. 나를 해치고 비방하고 욕하고 헐뜯는 사람들에게 어떻게 하면 복수할 수 없을까, 어떻게 보복하고, 앙갚음을 할 수 없을까 생각하다가 밤잠을 설치는 것이 아닙니까?

사람들이 얼마나 남을 판단하기를 좋아하는가, 남을 판단함으로 인해 생기는 질병에 대해 정신과 의사 데이빗 핑크는 ‘신경 긴장에서의 해방’이라는 주제로 논문을 썼습니다. 그는 일만 명의 긴장과 불안감에 쌓여있는 환자를 상담하다보니 일만 명 모두가 판단전문가들이었습니다. 그들은 한 사람도 예외 없이 아침부터 저녁까지 계속 남을 비판하고 정죄하는 비판적인 성격의 소유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모두가 이 의사 선생은 이래서 이렇고, 저 간호사는 저래서 그렇고, 저 영양사는 이래서 이렇고, 저 환자는 저래서 그렇고, 그들은 자고 나면 정죄하고 비판하고 판단하였습니다. 그 후 그는 환자들에게 “오늘부터 당신은 다른 사람을 비판하지 마시오. 판단하지 마시오. 그저 감사하고 사랑하고 용서하시오. 그렇지 않으면 당신은 인생을 마치게 될지도 모른다”고 처방해 주었습니다. 그 결과 놀랍게도 70%의 사람들이 나음을 받고 퇴원했습니다.

성경은 우리가 할 일은 복수가 아니라 원수가 목말라 할 때 마시게 하고, 배고파하면 먹이게 하라는 것입니다. 그리함으로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라”고 했습니다. 옛날에는 여러 종류의 형벌이 있었습니다. 태형도 있었고, 교수형도 있었고, 단두형도 있었습니다. 그 중에 머리에 숯불을 올려놓은 형벌도 있었다고 합니다. 숯불을 머리에 올려놓으면 얼마나 뜨겁겠습니까? 이처럼 원수인 것을 알면서도 가서 어려울 때 먹을 것을 주고, 마실 것을 주면 그 사람은 머리로부터 전신이 뜨거운 사랑의 감동에 사로잡히게 된다는 것입니다. 사랑의 불에 녹을 때에 복수의 칼이 남아있을 수 없습니다. 우리가 사랑을 공급할 때에 원수의 마음을 녹일 수 있습니다. 원수로 하여금 하나님 앞에 회개하고 돌아오게 만들 수 있습니다. 원수를 갚는 최대의 무기는 복수가 아니라 사랑입니다. 사랑할 때 녹아집니다. 사랑할 때 하나님께서 은총을 내리십니다. 이를 보상적 은총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많은 핍박을 받았다면, 아름답고 선하게 살았다면, 진실하게 살았다면, 하나님께서 반드시 크게 갚아주십니다.

다섯째, 이웃에게 선으로 악을 이기라(21).

21절은 이웃을 대하는 원칙입니다. 21절을 암송하겠습니다.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 악을 선으로 갚는 것은 기독교 가치관의 핵심입니다. 반면에 선을 선으로, 악을 악으로 갚는 것은 불신자들의 윤리적인 가치관이고, 선을 악으로 갚는, 은혜를 원수로 갚는 것은 야만인들이나 동물세계에서나 볼 수 있는 가장 저급한 가치관입니다. 악을 선을 이긴 대표적인 인물이 있습니다. 그는 바로 요셉입니다. 요셉에게는 자기를 판 형제들이 있었습니다. 아버지 야곱이 운명하자 형들이 두려워 떨었습니다. “요셉이 혹시 우리를 미워하여 우리가 그에게 행한 모든 악을 다 갚지는 아니할까?” 이런 그들에게 요셉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요셉이 그들에게 이르되 두려워 마소서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리이까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만민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 당신들은 두려워마소서 내가 당신들과 당신들의 자녀를 기르리이다 하고 그들을 간곡한 말로 위로하였더라(창50:19-21).” 요셉은 선으로 악을 이겼습니다. 다윗 또한 원수 사울을 죽일 기회가 있었지만 죽이지 않았습니다. 원수 갚는 것이 하나님께 있다고 했습니다. 그는 자기 손으로 피를 묻히지 않았습니다. 그 때에 통일 이스라엘의 왕이요 목자가 될 수 있었습니다.

우리가 한을 품고 복수심을 가지고 산다는 것은 가슴이 불덩이를 가지고 사는 것과 같습니다. 가슴에 불을 가지고 다니면 가슴이 숯덩이처럼 시커멓게 됩니다. 따라서 우리는 선으로 악을 이겨야 합니다. 이럴 때 우리의 내면이 사랑과 기쁨, 감사와 즐거움으로 충만하게 됩니다. 이러기 위해서 우리는 성령의 지배를 받아야 합니다. 믿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이 때 세상의 원리를 이시고 성경의 원리대로 살 수 있습니다.

우리는 악을 이깁니다. 원수도 이깁니다. 핍박하는 자도 이깁니다. 그런데 어떻게 이기느냐, 바로 선으로 이깁니다. 악은 선으로 이기고, 미움은 사랑으로 이기고, 교만은 겸손으로 이깁니다. 자랑하는 자는 칭찬으로 이깁니다. 자랑하는 자를 핀잔주지 않고 즐거움으로 이깁니다. 정결함으로 부정을 이깁니다. 정직함으로 거짓을 이깁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의 원칙이요 하나님의 원리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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