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판하지 말라

조회 수 2139 추천 수 0 2012.07.11 06:16:48
로마서 14:1-12, 요절 14:1

비판하지 말라

“믿음이 연약한 자를 너희가 받되 그의 의심하는 바를 비판하지 말라(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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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모인 공동체입니다. 교회에 모인 하나님의 자녀들의 믿음의 수준은 千差萬別합니다. 성숙한 사람이 있는 반면에 미성숙한 사람도 있고, 믿음이 좋은 사람이 있는 반면에, 믿음이 어린 사람도 있습니다. 목적이 분명한 사람이 있는 반면에, 분명하지 않은 사람도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과 함께 지내다 보면 갈등과 분쟁이 있게 마련입니다. 초대 교회를 보면 곳곳에 갈등과 분쟁이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 대표적인 교회가 고린도 교회입니다. 고린도 교회는 성령의 역사가 강력하게 일어났던 교회입니다. 방언의 은사는 기본이고 신유의 은사, 예언의 은사를 받은 사람이 부지기수였습니다. 이런 교회에도 분쟁이 있었습니다. 갈라디아 교회에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갈라디아 교회는 율법신앙이 복음 신앙을 위협했습니다. 빌립보 교회는 은혜가 많은 교회로 소문이 났지만 유오디아와 순두게라는 두 자매가 서로 반목질시하여 분쟁이 생겼습니다. 골로새 교회와 에베소 교회에도 각기 여러 가지 문제로 분쟁이 있음을 보게 됩니다. 기독교 2,000년 역사를 보면 분쟁과 분열로 전철되어 있습니다. 우리나라 또한 예외가 아닙니다. 해방 후 60년 동안 한국 교회는 분열에 분열을 거듭하여 왔습니다. 우리 또한 분열의 아픔을 겪었습니다. 당시 로마 교회 안에도 서로 간에 갈등이 있었습니다. 이를 볼 때에 교회도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기 때문에 크고 작은 문제가 항상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문제는 이런 문제들을 어떻게 해결하느냐가 중요합니다. 우리가 어떻게 주님의 몸 된 교회를 바르고 건강하게 세워나갈 수 있습니까?

첫째, 연약한 사람을 영접하라(1-5).

당시 로마 교회에는 믿음이 강한 자들과 연약한 자들이 있었습니다(1-3). ‘믿음이 연약한 자’는 믿음의 연륜이 짧은 초신자들을 말합니다. 초신자들은 어린아이와 같이 넘어지기 쉽습니다. 당시 믿음이 약한 자들은 유대계 크리스천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오랫동안 안식일과 절기를 지켜왔습니다. 레위기 11장에 나오는 대로 깨끗한 음식물과 부정한 음식물을 엄격하게 가려서 먹었습니다. 특히 이들은 시장에서 파는 고기를 먹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상인들이 우상에게 바쳤던 고기를 시장에 내다 팔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우상에 바쳤던 음식을 먹는 것은 곧 우상의 제사에 참여하는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반면에 믿음이 강한 사람들은 그런 것에 자유로웠습니다. 그들은 시장에서 파는 고기를 먹으며 “벌 것 다 따지네, 고기는 그냥 고기이지, 거기에 귀신 이빨 자국이 있나, 침이 묻어 있나”하며 맛있게 먹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대로 입에서 나오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지, 입으로 들어가는 것은 사람을 더럽게 하지 않는다며 우상에 바쳐진 고기를 먹으며 조금도 거리낌이 없었습니다. 그들은 유대인들이 먹지 않는 돼지고기와 개고기도 잘 먹었습니다. 그들은 형식에 구애를 받지 않는 자유로운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런 문제로 인해 서로 간에 장벽이 생기고 서로 판단하고 미워하고 정죄하였습니다. 믿음이 강한 사람들은 믿음이 약한 사람들을 향하여 복음의 비밀도 알지 못하는 율법에 얽매인 형식주의자요 완고한 채식주의자다라며 비난하였습니다. 반면에 믿음이 약한 사람들은 믿음이 강한 자들에게 아무 것이나 먹는 불결하고 경건치 못한 자들이라고 비난했습니다. 그들은 같은 교회 안에 있으면서 함께 어울리지 않았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도록 합니까? 바울은 비판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1절을 보겠습니다. “믿음이 연약한 자를 너희가 받되 그의 의심하는 바를 비판하지 말라.” 바울은 믿음이 약한 사람을 받으라고 했습니다. ‘받으라’는 영접하고 수용하라는 말입니다. 바울은 그들을 비판하지 말고 영접하라고 했습니다. 왜 사람들이 남을 비판합니까? 각기 생각의 다름을 수용하고 인정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세상에는 얼굴 똑같은 사람 한 명도 없습니다. 쌍둥이도 똑같은 것 같은데 똑같지 않습니다. 이처럼 세상에는 나와 똑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이 한 명도 없고 각기 다른 생각을 하고 있다는 다름을 인정해야 합니다. 다시 말해 diversity, 다름과 다양성을 수용하고 인정해야 합니다. 어떤 사람은 이렇게 생각하고, 저 사람은 저렇게 생각한다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사람들은 내 생각과 맞지 않으면 무조건 틀리다는 흑백 논리로 접근합니다. 그러나 총천연색(colorful)으로 접근하고 이해하여야 합니다. 세상에 검정과 흰색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에는 빨간색도 있고, 노란색도 있고, 파란색도 있고, 핑크색도 있습니다. 믿음 또한 다양합니다. 믿음에는 붕어빵이 있을 수 없습니다. 믿음은 다양합니다. 다양성을 인정하는 교회가 건강한 교회이고 다양성을 인정하는 사회가 건강한 사회입니다. 건강한 공동체에 창조역사가 있습니다. 반면에 획일적인 사회는 폐쇄된 사회(closed society)입니다. 북한은 다양성이 존재하지 않는 획일적인 사회이기 때문에 건강하지 못한 사회입니다. 왜 사회가 분열되고 교회가 깨집니까? 각기 다름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왜 가정이 깨집니까? 남자와 여자가 서로 다르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존 그레이가 쓴 금성에서 온 여자, 화성에서 온 남자라는 책을 읽어 보셨습니까? 저자가 이 책에서 말하고자 하는 핵심은 남자와 여자가 서로 다른 행성에서 왔기 때문에 사고방식과 생활양식 등이 다르니 서로간의 차이를 인정하고 존중하라는 것입니다.

화성인 남자가 망원경을 통해 먼 금성의 아름다운 여자를 보는 순간 가슴이 뛰기 시작합니다. 마찬가지로 화성인을 본 금성인 역시 그러합니다. 그들이 처음에 만났을 때 신기하게도 서로의 차이를 인정하고 사랑하고 조화를 이루며 살아갑니다. 그러나 어느 날 그들이 지구로 왔을 때 기억상실증으로 인해 자신들이 원래부터 다른 행성에서 왔고, 서로 다르다는 사실을 기억하지 못하게 됩니다. 그들은 서로에 대한 차이점을 인식하지 못해 충돌하기 시작합니다. 화성인은 스트레스를 받거나 고민할 거리가 있으면 동굴 안으로 들어가 해결책을 찾습니다. 반면에 금성인은 누군가에게 자기 문제를 터놓고 이야기를 함으로 해결책을 찾습니다. 그리고 남자는 고무줄과 같아서 잡아당겨질 때까지 최대한 멀어지고자 합니다. 반면에 여자는 파도와 같아서 사랑받는다고 느낄 때 여자의 자부심은 최고조에 이릅니다. 그러다가 갑자기 기분이 바뀌면 사정없이 곤두박질칩니다. 남녀가 문제의 해결방법이 다름을 인정을 해야 합니다. 그리고 저자는 남자나 여자나 공통적인 것은 90:10의 원칙이 적용된다고 보고 있습니다. 남자나 여자나 기분이 상해있을 때 90퍼센트는 과거와 연관되어 있으며, 나머지 10퍼센트는 현재로 인해 불쾌하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누군가가 지나가다가 당신의 팔을 쿡 찔렀거나 가볍게 부딪쳤다면 그 정도로는 별로 아프지 않습니? 그런데 이미 상처가 나 있는 팔을 누가 쿡 찔렀다거나 부딪치고 지나갔다면 훨씬 더 아프게 느낄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풀리지 않은 과거의 감정을 무심코 던진 말한 마디와 가벼운 스침에 과민한 반응을 보입니다. 저는 가끔 그렇지 않을 사람이 갑자기 화를 내고 분노를 표출하고 얼굴이 일그러지고 말과 행동이 거칠어지는 것을 봅니다. 이는 과거의 아픈 상처를 다쳤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과거의 경험이 중요합니다. 그리고 과거의 상처는 반드시 치유되고 회복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건강한 사람이 됩니다.

우리는 피차 다름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다르다는 것은 그만 두고 남자를 여자로 만들고, 여자를 남자로 만들려고 합니다. 여기에 갈등이 생깁니다. 따라서 아내는 남편을 자기와 같은 모습으로 만들지 말고, 남편은 아내를 자기와 같은 모습으로 만들려고 하지 마세요. 사실 만들 수도 없습니다. 그리고 남자라고 다 똑같은 남자가 아니고, 여자라고 다 똑같은 여자가 아닙니다. 다 각기 다릅니다. 경숙이가 다르고, 민정이가 다르고, 수희가 다르고, 효정이가 다르고, 조은이가 다릅니다. 멀시가 다르고 에스더가 다릅니다. 같은 자녀라 할지라도 경건이가 다르고 재건이가 다릅니다. 바울이가 다르고 조은이가 다릅니다. 선목이가 다르고 선지가 다릅니다. 주성이가 다르고 하진이가 다릅니다. 우리가 나와 다르다는 것을 인정할 때 그 사람을 이해하게 되고 수용하게 됩니다.

그러면 왜 우리가 남을 비판해서는 안됩니까? 하나님께서 저들을 받으셨기 때문입니다. 3b,4절을 보겠습니다. “이는 하나님이 저를 받으셨음이니라 남의 하인을 판단하는 너는 누구뇨.” 하나님께서는 채식하는 사람들도 하나님의 자녀로 삼으셨습니다. 고기 먹는 사람들도 하나님의 자녀로 받아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받아주셨기 때문에 우리는 그들을 정죄하고 판단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주인으로 모시고 사는 하인들이요,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사람들을 감히 누가 비판할 수 있습니까?

우리는 여기에서 His part, our part, 하나님의 하실 일이 있고, 우리의 할 일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내가 할 일은 영접하고, 이해하고, 믿어주고, 사랑하고, 기도하고, 감사하고 칭찬하고, 격려하여 주는 것입니다. 비판은 나의 영역이 아니라 하나님의 고유 영역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고유 영역을 침범해서는 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사람들 중에는 남을 비판하는 것을 업으로 삼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아니 어쩌면 그게 그의 취미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정도의 차이일 뿐 사람들은 너나 할 것 없이 남을 비판하고 정죄하는 것을 아주 좋아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옳지 않습니다. 사람이 사람을 비판하게 되면 비판하는 사람의 마음이 황폐해집니다. 사람이 비판을 하면 인간 관계성이 깨지어 한 사람도 동역자를 얻을 수 없게 됩니다. 비판하는 곳에 가정이 깨지고 국론이 분열되고 교회가 깨집니다. 따라서 비판하기보다 서로 이해하고 사랑해야 합니다. 톨스토이는 이런 유명한 말을 남겼습니다. “누구를 비판하고자 할 때 정면으로 비판하지 말라. 그것은 남에게 창피를 주는 것이다. 비판을 받는 사람은 비판 받는 사람 앞에서 자기의 낮아짐을 인정해야 하는데 그것은 사람의 마음을 더 없이 아프게 한다. 또 사람이 안보는 데서 남을 비판하는 것은 더 나쁘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가 대답하기를 모른척하라. 더 중요한 것은 아예 비판하는 사람을 보지 말라. 허물이 될 이야기는 듣지도 말고, 비판해야 할 이야기는 기억도 하지 말라. 그것이 아름다운 것이다. 그리고 좋은 점만 보려고 노력하라. 그것으로 부족한 점을 다 소화해버리라. 이게 제일 아름다운 것이다.”

5절을 보겠습니다. “혹은 이 날을 저 날보다 낫게 여기고 혹은 모든 날을 같게 여기나니 각각 자기 마음에 확정할지니라.” 각각 자기 마음에 확정하라는 것은 심판자이신 하나님 앞에서 각자의 행위에 대한 책임을 지고 살라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신앙적인 것이 있고, 윤리적인 것이 있습니다. 절대적인 것이 있고, 상대적인 것이 있습니다. 양보할 수 없는 것이 있고, 양보할 수 있는 것이 있습니다. 본질적인 문제가 있고, 비본질적인 것이 있습니다. 신앙적인 것과 문화적인 것이 있습니다. text와 context가 있습니다. 형식적인 것과 내용적인 것이 있습니다. 여기에서 형식은 변하고 내용은 변하지 않습니다. 문화는 변하지만 복음은 변하지 않습니다. context, 상황은 변하지만 text는 변하지 않습니다. 바울은 신앙의 문제에서 만큼은 절대로 양보하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본질적인 것을 붙들었습니다. 반면에 상황적인 문제에 대해서는 너그러웠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반대로 비본질적인 것, 사소한 것에 목숨을 걸고 싸웁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절대적인 것과 상대적인 것을 구분할 수 있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이것을 구별하지 못하니까 절대적인 것은 양보하고, 양보할 문제 앞에서는 절대를 주장하는 모순이 생깁니다. 유대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이 지키던 월삭, 유월절, 오순절, 초막절 등이 있었습니다. 이 절기는 구약 성경에 기록된 절기들이고, 영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이 날들을 귀히 여기고 지켜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반면에 믿음이 강한 크리스천들은 모든 날이 동일한 날이니 특별히 거룩하게 지킬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또 어떤 사람은 금요일은 주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날이라고 하여 금식하며 기도하는 날로 정해서 지키기도 하였습니다.

오늘날 주일을 지키는 문제도 그러합니다. 어떤 사람은 주일 예배를 드리고 오후에 운동하는 것이 옳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주일 오후에 운동하는 것을 낙으로 삼는 사람도 있습니다. 주일 예배를 드린 후에 축구하는 것이 옳고 그르냐는 본질적인 문제가 아닌 비본질적인 문제입니다. 그것을 가지고 그 누구도 그 형제를 판단해서는 되지 않습니다. 각자가 심판자이신 하나님 앞에서 각자의 행위에 대한 책임지고 하면 됩니다.

둘째, 누구도 나를 위하여 살 수 없다(6-9).

6-12절을 보면 ‘위하여’라는 말이 여덟 번 나옵니다. 이것은 목적이 중요하다는 것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날을 중히 여기는 자도 주를 위하여 감사하며 지키고, 먹는 자도 주를 위하여 감사하며 먹고, 또한 먹지 않는 자도 감사하며 주를 위하여 먹지 않습니다. 목적이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이기 때문에 상대방을 무시하거나 판단해서는 되지 않습니다. 모든 가치는 목적으로 결정됩니다. 방법도 목적으로부터 나옵니다. 목적은 절대적이지만 방법은 다양합니다. 모든 사물은 목적에 따라 그 가치가 달라집니다. 칼이 어머니 손에 쥐어지면 좋은 음식이 만들어지고, 의사 선생님의 손에 들려지면 죽을 사람이 살아납니다. 그러나 강도의 손에 들려지면 그 칼은 사람을 죽이고 상해를 입힙니다. 칼은 어떤 목적을 위하여 사용되느냐에 따라 그 가치가 달라집니다. 그리고 칼 자체는 스스로 목적을 갖지 못합니다. 유명한 “Isolation is impossible”, 고립된 존재는 불가능하다는 말이 있습니다. 칼이 혼자 있어 보세요. 아무 가치도 없고 의미도 없습니다. 따라서 목적이 죽고 사는 문제보다 더 중요하고 우선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죽고 사는 것이 아주 굉장한 일인 것처럼 생각합니다. 우리가 보통 그렇게 말하지 않아요? ‘일단 살고 보자.’, ‘일단 먹고 보자.’, ‘우선 살고 볼일이다.’ 그러나 성경은 목적을 중히 여깁니다.

7절을 보겠습니다.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 세상에 자기를 위하여 사는 사람, 자기를 위하여 죽는 사람 한 명도 없습니다. 자매들이 화장을 합니다. 왜 하지요? 자기를 위해서 합니까? 아닙니다. 다른 사람에게 자기를 예쁘고 아름답게 보이기 위해서 하는 것 아닙니까? 이를 볼 때 살고 죽는 것보다 목적이 우선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분명한 삶의 목적이 있어야 합니다. 목적이 분명하면 삶의 의미가 분명하고, 그 목적이 원대하면 그만큼 그 삶이 값지고 원대합니다. 반면에 목적이 없고 그 목적이 변변치 않으면 그 삶 또한 가치와 의미가 없게 되고, 그 삶 또한 변변치 않습니다. 사람이 열심히 살기는 살았는데, 목적이 없는 삶을 살았다면 이것은 헛산 것입니다. 따라서 여러분은 분명한 삶의 목적을 찾아 분명한 삶의 목적을 가지고 살기를 바랍니다.

모든 사물에는 모두 그 본래의 목적이 있습니다. 인간의 본래 목적은 나를 위해 창조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나님을 예배드리는 예배자로, 그리고 다른 사람을 위하여 살도록 창조되었습니다. 여기에 인간의 존재의미와 가치가 있습니다. 여기에 나의 나 됨이 있습니다. 이 본래의 목적을 역행하게 될 때에 불행하게 되고, 기쁨도 사라지게 됩니다. 따라서 자기를 위해 사는 이기적인 사람은 가장 불행한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은 고독하고, 허무주의에 빠지어 인생무상에 빠지게 됩니다. 성경에 “악인이 재산을 모으면 결국 선한 사람을 위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일생동안 자기를 위하여 벌었지만 엉뚱한 사람이 쓰게 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나를 위해 미련스럽게 재산을 모으거나 쓰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영광과 다른 사람을 위하여 물질을 모으고 이를 위하여 쓰시기 바랍니다.

8절을 보겠습니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라.” 그리스도인들은 자기 유익을 위해 사는 자가 아니요, 또 죽는 것도 자기를 위하여 자기 마음대로 죽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주님께 속했기 때문입니다. 자연인은 태어나면서부터 그 관심이 자기 자신에게 쏠려 있습니다. 이것은 본능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고 성령으로 다시 태어난 사람은 제일 먼저 무엇을 배우게 됩니까? ‘내’가 아닌 ‘주님’입니다. ‘나를 위하여’가 아니라 ‘주님을 위하여’입니다. 이를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셨습니다(9). 이는 죽은 자와 산 자의 주가 되려 하심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서로의 신앙을 인정하고 비판하지 말아야 합니다.

셋째, 모든 판단을 주님께 맡겨라(10-12).

이제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모든 판단을 주님께 맡겨야 합니다. 10절을 보겠습니다. “네가 어찌하여 네 형제를 판단하느뇨? 어찌하여 네 형제를 업신여기느뇨? 우리가 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리라.” 우리 신자들은 근본적으로 형제를 판단하거나 업신여길 자격이 없습니다. 우리는 모두 한 형제요, 자매로서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똑같이 서야 할 죄인들입니다. 남을 판단하는 사람도, 형제를 업신여기는 사람도 똑같이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서 자기 죄를 고백해야 합니다. “내가 살았노니 모든 무릎이 내게 꿇고 모든 혀가 하나님께 자백하리라(11).” 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서 무릎을 꿇고, 모든 사람들은 자기 혀로 각자 자백합니다. 여기에는 한 사람도 예외가 없습니다. 믿음이 강한 자도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서 공의로운 심판을 받아야 합니다. 약한 자라고 하나님이 봐 주시지 않습니다.

우리는 때로 서로가 ‘주를 위하여’라고 말할 때가 많습니다. 이 때 무엇이 ‘하나님을 위하여’인지 구별하기 참 어렵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사사건건 따질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가면 다 드러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러므로 우리 각인이 자기 일을 하나님께 직고하리라(12).”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는 다른 사람의 문제를 가지고 나가는 자리가 아닙니다. 각 사람이 자기 일을 직접 하나님께 고하는 자리입니다. 각 사람이 홀로 서서 하나님의 심판을 받는 자리입니다. 심판대 앞에서 서서 “주님, 나는 주를 위하여 이렇게 했습니다”라고 할 때 주님께서 “착하고 충성된 종아, 잘 하였도다”라고 하면 주를 위하여 산 것이고, “악하고 게으른 종아” 하면 평소에 주를 위하여 산다는 것이 자기를 위하여 산 것이 됩니다. 그러므로 심판대 앞에 서서 하나님께 직고하는 자세로 ‘주를 위하여’ 사십시오.

강한 자는 약한 자들의 약점을 감당해 주어야 합니다. 약한 자는 강한 자를 비판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영접한 것처럼 우리도 서로 영접해야 합니다. 분명한 삶의 목적을 가지고 살기를 바랍니다. 서로 다양성을 인정하고 하나님을 위하여 한 마음 한 뜻이 되어 교회를 세우고 하나님 나라를 확장하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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