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강 이사야서 49:1-26

이방의 빛으로 삼아

그가 이르시되 네가 나의 종이 되어 야곱의 지파들을 일으키며 이스라엘 중에 보전된 자를 돌아오게 할 것은 매우 쉬운 것이라 내가 또 너를 이방의 빛으로 삼아 나의 구원을 베풀어서 땅 끝까지 이르게 하리라.”

 

민족이라는 단어는 소중합니다. 민족이란 단어 속에는 인종과 언어와 문화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민족주의는 아주 위험합니다. 2차 대전의 발발도 히틀러의 민족주의에서 시작됐습니다. 그래서 에리히 프롬은 이러한 민족주의의 악행을 보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민족주의는 근친상간이며 우상숭배이자 광기이다.” 또한 괴테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문화의 수준이 가장 낮을 때 민족주의의 감정이 가장 강하고 격렬하다.” 수많은 독재자들과 선동가들이 민족주의와 애국심을 주창하면서 많은 사람들을 조종했습니다. 그리고 수많은 악을 만들어냈습니다. 민족보다 더 중요한 보편적 가치인 인권, 생명, 자유, 정의, 평화를 이야기하지 않는 민족주의는 아주 위험합니다.

이스라엘은 자신들만이 선택된 민족이라는 자부심을 넘어서 배타적이었습니다. 다른 민족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자기 이외의 민족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그들을 부르신 목적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세운 것은 이스라엘을 통해서 온 천하가 복을 받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이기적인 욕심에 가득 차 있었습니다. 천박한 민족주의가 되었습니다.

이스라엘이 천박한 민족주의자가 된 것은 하나님께서 복을 주셔서 배가 부르고 등이 따뜻할 때였습니다. 그들은 풍요가 자신들의 힘과 능력 때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때부터 감사가 사라졌습니다. 가슴의 찢음과 떨림이 사라졌고 말씀에 대한 감동과 울림이 없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뜻을 잃어버리고 사명을 망각한 백성으로 전락했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그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그가 이르시되 네가 나의 종이 되어 야곱의 지파들을 일으키며 이스라엘 중에 보전된 자를 돌아오게 할 것은 매우 쉬운 일이라 내가 또 너를 이방의 빛으로 삼아 나의 구원을 베풀어서 땅 끝까지 이르게 하리라”(49:6). 본문을 통해 하나님의 부르심과 훈련, 그 사명과 목적, 그리고 부르심에 대한 순종을 배우기를 기도합니다.

1. 하나님의 부르심(49:1)

섬들아 내게 들으라 먼 곳 백성들아 귀를 기울이라”(49:1). 여기서 섬들먼 곳 백성들은 세계 모든 나라, 열방을 말합니다. 이사야는 비록 예루살렘에서 사명을 감당하고 있었지만 그의 눈은 예루살렘을 벗어나서 열방으로 향하였습니다. 그는 비록 작은 유대 땅 예루살렘에서 살고 있었지만 그의 가슴은 전 세계를 품고 있었습니다. 그의 스케일은 거대했습니다.

그의 메시지가 무엇입니까? 여호와께서 태에서부터 나를 부르셨고 내 어머니의 복중에서부터 내 이름을 기억하셨나이다”(49:1). 여기에서 란 메시아 곧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킵니다. 메시아란 기름 부음 받은 자란 뜻입니다. 그런데 스스로 기름을 붓고 자칭 메시아라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어떤 이단을 자기를 보혜사 성령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자기가 하나님이라고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하나님은 예수님께 기름을 부으시고 메시아로 세우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르심은 태에서부터 부르셨습니다. 어머니 복중에서부터 이름을 기억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탄생하시기 전에 하나님은 천사를 통해 자기 백성을 죄에서 구원할 구주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천사를 통해 나실 자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큰 자로 다윗의 위를 이을 왕이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는데 가장 중요한 것은 부르심입니다. 부르심에 대한 분명한 확신과 절대적인 자세가 있어야 만이 하나님의 사명을 감당할 수가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조금 어려우면 사명에 대해 회의를 느끼고 갈등하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부르심을 확신할 때 어떤 환경과 역경 중에도 주어진 사명을 감당할 수 있습니다.

성경에 보면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한 사건이 700번 나옵니다. 한마디로 성경은 하나님의 거룩한 부르심으로 이어지는 위대한 소명의 역사입니다. 성경 곳곳에 하나님은 내가 알기 이전부터 이미 부르셨다고 말씀하였습니다. 하나님은 태중에서 내 입과 손과 귀와 눈의 형체가 갖추어질 때마다 거룩한 목적과 특별한 뜻을 두고 깊은 뜻 가운데 부르셨습니다. 다만 나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알지 못했을 뿐입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은 나의 능력과 재능과 외적인 데 있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신앙생활 하다가 자신의 무능과 허물을 바라보고 하나님의 부르심을 의심할 때가 있습니다. 학점이 잘 나오지 않고 직장에서 좀 어려운 일이 생기고 사업이 잘 안되고 가정에 좀 문제가 생기면 하나님의 부르심에 의심이 듭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미 나를 태중에 있을 때부터 부르셨습니다. 내가 나 자신을 바라볼 때 소망이 없어 보일지라도 하나님께서는 소망의 눈으로 나를 보셨고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위대한 자를 부르셔서 위대하게 하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부족한 자를 부르셔서 위대하게 하십니다.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로운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이는 아무 육체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고전 1:26-29).

그리고 하나님의 부르심은 절대적입니다. 그런데 인간의 부름은 상대적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언제든지 변할 수 있습니다. 청년 실업자가 지난 6월에 449000명으로 작년에 같은 6월과 비교하여 42000명이 증가했습니다. 청년 실업률은 10.2%를 기록했습니다. 앞으로 3-4년은 고용절벽시대가 될 것이라고 예측하고 있습니다. 힘들게 취업하면 감원이니 권고사직이니 명퇴라는 이름이 등장합니다. 고용시장이 불안합니다. 그래서 고용시장이 가장 안정하다고 여기는 공무원과 교사가 되기 위해 피를 토하며 공부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부르심은 절대 불변합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은 인간의 행위에 따라 좌지우지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한번 택한 자는 영원불변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부르심은 그 누구도 거절할 수 없는 불가항력적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 만백성들의 제사장 나라로 택하셨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배반하고 여호와 하나님을 버리고 각종 우상을 섬겼습니다. 그리고 배타적인 민족주의에 함몰되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그들을 보시고 탄식하셨습니다. 슬프다 범죄한 나라요 허물 진 백성이요 행악의 종자요 행위가 부패한 자식이로다 그들이 여호와를 버리며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를 만홀히 여겨 멀리하고 물러갔도다”(1:4).

그렇다면 하나님이 보실 때 우리를 어떻게 생각하실까요? 그리고 이제 우리는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하나님은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은 변개치 않습니다. 부르심을 굳게 붙들 수 있 있기를 기도합니다.

2. 하나님의 연단(49:2-3)

내 입을 날카로운 칼 같이 만드시고 나를 그의 손 그늘에 숨기시며 나를 갈고 닦은 화살로 만드사 그의 화살 통에 감추시고”(49:2). 하나님의 부르심만으로는 안 됩니다. 부르심을 받았으면 연단을 받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부르셔서 날카로운 칼과 같이 갈고 닦은 화살이 될 때까지 연단하십니다.

칼과 화살이 나오기까지의 과정을 보면 긴 시간이 필요로 합니다. 먼저 광석을 채광해야 합니다. 채광한 광석을 잘게 부수어 6,000도 되는 용광로에 집어넣어서 녹여야 합니다. 그리고 달구어진 무쇠를 수천 마력의 세찬 바람을 불어넣어 불순물을 날려버려야 합니다. 이를 불에 달구어 무거운 해머로 수천, 수만 번 내려쳐서 철 속의 기포를 없애고 밀도를 높여야 합니다. 그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찬물 속에 집어넣어 열처리를 하고 계속 담금질을 해야 합니다. 이런 과정을 수없이 하여야 강한 쇠가 나옵니다. 이것으로 끝나서는 안 됩니다. 이제 이것을 풀무에 넣어 칼과 화살을 만들어 숫돌에 수없이 갈아야 날카로운 칼과 뾰족한 화살이 나오게 됩니다.

날카로운 칼과 갈고 닦은 화살이 나오기까지에는 많은 연단 과정이 필요한 것처럼 우리가 하나님의 사람이 되려면 많은 연단을 받아야 합니다. 연단을 받지 못한 백성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애굽에서 400년 동안 노예 생활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독수리 날개로 업어 그들을 애굽에서 구원하셨습니다(19:4).

그러나 그들은 400년 동안 찌들어 있는 노예근성을 쉽게 버리지 못했습니다. 노예근성은 내일에 대한 희망과 비전이 없는 것입니다. 노예철학은 순간을 최대한 즐기자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노예 백성들을 광야에서 40일을 갈 수 있는 길을 40년간 연단하셨습니다.

이제 하나님은 그들을 독수리 훈련을 시키셨습니다. 마치 독수리가 자기의 보금자리를 어지럽게 하며 자기의 새끼 위에 너풀거리며 그의 날개를 펴서 새끼를 받으며 그의 날개 위에 그것을 업는 것같이 여호와께서 홀로 그들을 인도하셨고”(32:11-12). 독수리는 새끼를 키울 때 새끼가 안일하게 지내지 않도록 그 보금자리를 어지럽게 합니다. 그리고 독수리는 하늘의 왕자로 키우기 위해 새끼를 강하게 훈련시킵니다. 새끼를 업어서 높은 곳으로 올라가서 사정없이 아래로 떨어뜨립니다. 그러면 새끼는 살기 위해 날개를 너풀거립니다. 어미 독수리는 그 새끼가 땅위에 떨어지기 직전에 날개로 업어 위로 올라가 또 다시 떨어뜨리고 또 업어 떨어뜨립니다. 이를 반복하여 새끼는 강하고 튼튼하게 자라 공중의 왕자가 되게 됩니다. 이것은 새끼에 대한 어미의 사랑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이 안일과 정욕의 보금자리를 어지럽혀 제사장 나라요 거룩한 백성으로 삼으셨습니다. 하나님은 독수리 훈련을 통해 노예백성들의 특징인 원망과 불평의 죄악의 물을 빼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법을 가르쳐서 거룩하신 하나님의 백성으로 삼으셨습니다. 진정한 사랑이란 얄팍한 감정적인 사랑이 아니라 연단을 통해 하나님의 백성이 되도록 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젊은 사람이 심약합니다. 이는 어려서부터 동정과 사랑만 받고 자랐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분야의 최고가 되려면 많은 연단과 담금질이 필요로 합니다. 훈련이 없으면 그 분야의 최고가 될 수 없고 고수가 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많은 연단과 담금질을 통해 훈련된 사람이 되면 어디를 가더라고 쓰임 받을 수 있습니다. 어떤 환경과 처지에서도 좌절하지 않게 됩니다. 21세기는 무한 경쟁의 시대요 최고가 되지 못하면 힘든 시대입니다. 우리가 무한 경쟁의 21세기에서 최고의 전문인이 되려면 설렁설렁 설렁탕을 먹어서는 안됩니다. 독수리 훈련이 필요로 합니다.

욥은 사단의 송사로 많은 시련과 연단을 받았습니다. 그의 사랑하는 자식들과 수백 수천의 양과 소를 하루아침에 다 잃었습니다. 그는 발바닥에서 정수리까지 악창에 걸려 기왓장으로 득득 긁어야 했습니다. 그의 현실이 너무나 비참하여 그의 아내는 하나님을 저주하고 죽으라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그러나 내가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순금 같이 되어 나오리라”(23:10).

하나님의 역사에 쓰임을 받는 사람들은 모두 훈련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모세는40년 간 궁중교육과 40년 동안 자신의 혈기와 감정을 죽이는 훈련을 받았습니다. 이 때 그는 온유하고 겸손한 목자가 되어 노예 백성들인 이스라엘을 구원할 수 있었습니다. 다윗도 처음부터 사랑과 공의의 왕이요, 이스라엘의 목자가 된 것은 아닙니다. 그는 소년 시절에 양치는 목동 훈련을 받았습니다. 어린 나이에 하나님의 종으로 부르심을 받았지만 나이 30이 되도록 사울에게 쫓겨 오랜 망명생활을 하여야 했습니다. 그는 이런 훈련을 통하여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신앙을 소유하고, 연약한 자들을 이해하고 사랑할 수 있는 목자요 왕이 될 수 있었습니다.

내 입을 날카로운 칼같이 만드시고 입은 그 사람의 인격을 나타내는 도구입니다. 그리고 말은 인격의 표현입니다. 입을 날카로운 칼같이 만든다는 것은 인격이 다듬어지고 지성과 영성이 있는 사람이 되는 것을 말합니다. 속사람이 변화된 삶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방법이 아니라 인격을 통해 이루어집니다. 인격이 다듬어지지 않고, 심성과 영성이 없는 사람은 아무리 고상하고 아름다운 말을 할지라도 이는 울리는 꽹과리에 불과합니다.

그러면 말씀을 왜 검에 비유했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은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과 생각과 뜻을 판단하나니”(4:12). 하나님의 말씀은 죄악된 영혼의 심령을 찔러 쪼갭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는 곳에는 죽은 영혼이 살아납니다. 하나님 나라가 건설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이 능력이 있어도 우리가 전하는 말씀이 날카롭지 못하면 능력이 나타나지 않습니다.

그리고 칼과 화살은 전쟁무기입니다. 우리의 전쟁은 혈과 육의 싸움이 아니라 영적인 전쟁입니다. 하나님을 대적하는 사상과 이즘을 파하는 전쟁입니다. 사탄 마귀는 우리의 지혜나 힘으로 결코 이길 수 없습니다. 우리의 힘으로 육신의 본성을 깰 수 있습니다. 우리의 지혜로 육신의 본성인 안일, 정욕, 원망, 불평, 불순종의 죄악을 이길 수 없습니다. 사탄과 마귀와 싸워 이길 수 있는 무기는 오직 말씀입니다. 예수님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사탄을 이기셨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여 주야로 묵상했습니다(119:97). 말씀을 묵상하기 위해 야경이 깊기 전에 잠을 깨었습니다(119:148). 그는 말씀이 얼마나 단지 꿀보다 더 달다고 고백했습니다(119:103). 우리가 말씀을 사랑하고 묵상하고 말씀에 순종할 불신이 팽배한 이 시대에 전도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말씀을 사랑하고 말씀을 좇아 살 때 범사에 감사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묵상하고 암송할 때 탐욕과 이기심을 극복하고 하나님과 이웃에 대해 헌신하는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말씀이 내 안에 살아있을 때 드높은 이상과 비전, 청년다운 기백을 가지고 살 수 있습니다. 우리가 말씀을 사랑하고 암송하고 순종하고 지켜서 내면에 불순물을 제거하고 예수님의 인격을 소유한 하나님의 사람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내게 이르시되 너는 나의 종이요 내 영광을 네 속에 나타낼 이스라엘이라 하셨느니라”(49:3). 하나님께서 훈련시키시는 목적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고자 함에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자기의 영광과 자기 이름을 드러내기를 좋아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종들은 하나님의 영광과 이름을 드러내고 높여야 합니다.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능력과 공의를 드러내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높여야 합니다. 무슨 일을 하더라도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어야 합니다. 사람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않으면 결국 돼지 대가리에 절하는 어리석고 우매한 자가 됩니다(1:23).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낼 때 값지고 아름답게 됩니다.

3. 사명과 승리(49:4-7)

이사야는 열심히 일했습니다. 그는 3년간 벗은 몸, 벗은 발로 장차 나타날 하나님의 심판의 메시지를 전했습니다(20:3). 그는 열심히 전도하고 회개의 메시지를 전파했습니다. 이 때 열매를 맺으면 기쁨이 있고, 수고한 보람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사야는 열심히 한만큼 열매가 없었습니다. 백성들은 더 완고하여 목은 쇠의 힘줄이요 이마는 놋과 같았습니다(48:4). 이 때 그는 공연히 헛짓을 하였다고 문제에 빠지기 쉬웠습니다. 그러나 이사야는 어떠했습니까?

참으로 나에 대한 판단이 여호와께 있고 나의 보응이 하나님께 있느니라 그러므로 내가 여호와 보시기에 영화롭게 되었으며 나의 하나님은 나의 힘이 되셨도다”(49:4-5). 이사야는 절망 중에 하나님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때 하나님은 보응이 되셨습니다.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본토 친척 아버지 집을 떠났습니다. 그리고 믿음으로 살았습니다. 믿음으로 살고자 조카 롯에게 좋은 것을 다 양보했습니다. 그리고 롯을 구하기 위해 물질을 다 썼습니다. 그 때 그는 손에 무엇이 잡히는 것이 없어 불의에 빠졌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그를 여호와 하나님이 지극히 큰 상급이 되심을 말씀하셨습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을 통해 축복을 받고자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 자체가 큰 상급이십니다. 하나님 안에 모든 것이 다 있습니다. 그 안에는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감추어져 있느니라”(2:3). 하나님은 그를 믿는 자에게 반드시 큰 상급을 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선을 행하다가 낙심할 필요가 없습니다. 때가 되면 반드시 거두게 됩니다(6:9). 성경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결실하며 흔들리지 말고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을 앎이라”(고전 15:58).

그리고 하나님은 그를 영화롭게 하셨습니다. 그 때 그는 조금도 위축되지 않았습니다. 그리했을 때 가난하게 살았지만 부한 자 앞에서 조금도 위축되지 않았습니다. 권세가 없었지만 권세 잡을 자들 앞에서 당당하게 복음을 전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종들은 어떤 사람과도 비교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종들은 판검사나 재벌들과 군벌과도 비교할 수 없는 영화롭습니다.

또한 이사야는 하나님이 나의 힘이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자신의 경험과 능력, 의지를 믿고 의지하기 쉽습니다. 어떤 사람은 자신의 운전 실력을 믿는 것을 보았습니다. 세상의 물질과 권력을 의지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이런 것은 한계가 있습니다. 원숭이가 나무에서 떨어진다는 말이 있듯이, 자신의 실력이나 자신의 능력을 의지해서는 안 됩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먹지 못해 힘이 없는 줄 알고 열심히 먹습니다. 어떤 자매는 우리 집에 식물만 먹는 것을 보고 그것 잡수시고 어떻게 사느냐고 말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우리가 고기를 먹지 못해 힘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안일을 좋아하고 십자가를 사랑하지 않기 때문에 힘이 없는 것입니다. 힘의 원천은 하나님께 있습니다. 힘은 순결과 헌신에 있습니다. 하나님만이 나의 힘의 원천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연단하시고 영화롭게 하시고 힘이 되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가 이르시되 네가 나의 종이 되어 야곱의 지파들을 일으키며 이스라엘 중에 보전된 자를 돌아오게 할 것은 매우 쉬운 것이라 내가 또 너를 이방의 빛으로 삼아 나의 구원을 베풀어서 땅 끝까지 이르게 하리라.” 그것은 이방의 빛으로 삼기 위함이었습니다. 이방의 빛이 무엇입니까? 이방에 복음을 전하여 그들을 구원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방에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유대인들과 같이 자기만을 즐기는 유다이즘에 빠져 아무 쓸모없게 됩니다. 예수님이 승천직전에 주신 말씀이 무엇입니까?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1:8). 이 말씀은 예수님의 지상명령(The Great Commandment), 예수님의 지상사명(The Great Commission), 예수님의 마지막 유언의 말씀(Last Word)입니다.

우리가 이 말씀을 순종하려면 민족주의를 넘어서야 한다. 민족주의는 다른 민족과의 관계에서 배타적입니다. 히틀러나 일본의 제국주의가 그러했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의 선민의식, 유다이즘은 이에 비할 바가 아닙니다. 유대인들은 타민족을 지옥의 땔감 정도로 여길 만큼 배타적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민족주의와 이즘을 넘어서야 합니다. 그리고 지방색의 껍질을 벗어버려야 합니다. 전 세계의 모든 민족을 위해 기도하고, 그들에게 화평의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그리고 삶의 우선순위를 가져야 합니다. 내가 잘 먹고 잘사는 것 또한 중요합니다. 좋은 집을 사고 집의 평수를 늘리는 것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이보다 더 중요하고, 먼저 바라고 기도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이방의 빛이 되어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이방은 예수님을 알지 못하는 모든 이를 포함합니다. 바로 예수님을 알지 못하는 이웃이 이방입니다. 내 옆의 동료가 이방입니다. 가족 중에 예수님을 믿지 않는 분이 바로 이방입니다.

우리가 이들에게 복음을 전할 수 있는 기회가 무한정한 것이 아닙니다. 형제들아 너희가 스스로 지혜 있다 하면서 이 신비를 너희가 모르기를 내가 원하지 아니하노니 이 신비는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들어오기까지 이스라엘의 더러는 우둔하게 된 것이라”(11:25).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들어오기까지 이스라엘이 더러는 완악해진다는 것입니다. 이를 볼 때 하나님이 이방인들을 무한정 구원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이방인의 수가 들어오는 기간이 있고, 하나님이 마음에 두고 계시는 숫자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 숫자가 다 찰 때까지만 이방인에게 구원의 문을 열어두십니다.

그런데 누구도 구원받을 이방인의 총수가 얼마이고, 언제쯤 다 찰지, 그때를 정확하게 알 수 없습니다. 성경 어디에도 알 수 없습니다. 이것은 하나님만이 아십니다. 이단들은 구원의 숫자가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144,000명이라고 주장합니다(7:4). 그래서 어떤 이단은 그 숫자에 들어야 한다며 미혹합니다. 그러나 이는 가장 많은 수를 뜻하는 상징적인 것이지 특정 인원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이 고작 144,000명을 구원하시고자 독생자 예수님을 보내셔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게 하셨겠습니까? 그리고 초대교회 때부터 지금까지 믿은 사람이 144,000명만 되겠습니까? 우리 중에 로마 카타콤에 가신 분도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갑바도기아에 가신 분도 있을 것입니다. 그 수많은 성도들이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영접하고 순교자의 길을 걸었습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명심해야 할 것은 예수님을 믿을 기회가 마냥 있다고 착각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언젠가 하나님이 이제 되었다고 하시면 구원의 문이 닫히게 됩니다. 그때는 예수님을 믿고 싶어도 믿을 수가 없습니다. 그때는 닫힌 문을 아무리 두드려도 열리지 않습니다. 한번 닫힌 문은 절대로 열리지 않습니다. 구원의 문이 닫히면 구원을 받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이 오실 날이 언제인지는 그 누구도 알 수 없지만 예수님이 도적같이 오시리라는 것만은 분명합니다. 지금일지, 오늘 밤일지, 아니면 내일일지 누구도 알 수 없습니다. 바로 지금이 은혜 받을 만한 때요, 구원의 날입니다. 주님이 재림하시는 날은 구원의 날인 동시에 심판의 날이기도 합니다. 심판의 날이 오기 전에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아 주님의 구속 역사에 쓰임 받아야 합니다. 오늘 김호욱 목자가 유학생 선교사로 파송을 받습니다. 하나님께서 힘든 학문의 과정 속에사도 열심히 복음을 전하여 제자 삼는 역사를 이루기를 기도합니다.

구원으로 인도하는 그 문은 참 좁으며 생명으로 인도하는 그 길은 참 험하니 우리 몸에 지워 있는 그 더러운 죄 짐을 하나 없이 벗어놓고 힘써서 들어갑시다 구원으로 인도하는 그 좁은 문 들어가 영생으로 인도하는 그 생명 길 갑시다”(새찬송가 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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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6 주일메시지 2021년 요한복음 1:19~34 보라 세상 죄를.....렘브란트의 돌아온 탕자 운영자 2021-01-19 223
425 주일메시지 2021년 요한복음 1:5~18 은혜와진리가 충만하신 예수님- 밀턴에게 베푸신 은혜 운영자 2021-01-16 406
424 주일메시지 2021년 요한복음 1:1~4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패니를 1000편의 찬송 작시자로 운영자 2021-01-04 629
423 2021년 신년 말씀 한 알의 밀알되신 예수님-예수 생명의 흔적을 남기자 운영자 2020-12-28 246
422 2020년 성탄 말씀 큰 기쁨의 좋은 소식 운영자 2020-12-22 264
421 2020년 성탄 제 3강 돋는 해 예수님, 희망의 예수님 운영자 2020-12-17 182
420 2020년 성탄 제 2강 축복의 통로로 쓰임 받은 마리아 운영자 2020-12-17 119
419 주일메시지 2020 성탄 제 1강 축복의 통로로 쓰임 받은 사가랴와 엘리사벳-니콜라이 집사이야기 운영자 2020-12-17 266
418 요한계시록 제1강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 운영자 2020-12-14 168
417 요한계시록 서론 운영자 2020-12-14 100
416 요한계시록 머릿말 운영자 2020-12-14 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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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주일 오전 예배 - 오전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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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마을교회 개척교회

우남식 목사님의 저서


    전도서에서 만난 복음
    (퍼플,2023)

      요한복음에서 만난 예수님
      (퍼플,2022)

        요한계시록에서 만난 복음
        (지식과 감성,2021)

          예레미야에서 만난 복음
          (지식과감성,2021)

            데살로니가전·후서에서 만난 복음
            (지식과감성,2020)

              이사야에서 만난 복음
              (지식과감성,2019)

                대학선교와 세계선교를 향한 권서행전
                (지식과감성,2019)

                  야고보서에서 만난 복음
                  (지식과감성,2017)

                    옥중서신에서 만난 복음
                    (지식과감성,2016)

                      행복과 긍정심리
                      (시그마 프레스,2015)

                        성심리
                        (시그마 프레스,2015)

                          마가복음에서 만난 예수님
                          (킹덤북스,2014)

                            사도행전에서 만난 복음
                            (생명의말씀사,2013)

                              로마서에서 만난 복음
                              (생명의말씀사,2012)

                                창세기에서 만난 복음
                                (생명의말씀사,2011)

                                    저서 구입연락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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