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라디아서 3:1-14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신 예수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3:13).

 

 

여자들에게 가장 필요하면서 가장 두려운 것은 저울이라고 합니다. 여자들은 저울 앞에만 서면 아주 경건해진다고 합니다. 그러나 애통하게도 저울은 자신의 모습을 꾸밈없이 보여줍니다. 이것이 원판불변의 법칙입니다.

저울은 사람의 겉모습을 보여주지만 속내를 보여주지는 못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겉모습을 보고 평가합니다. 사람의 외모를 보고 채용하고, 사람의 외모를 보고 배우자를 선택합니다. 그러다가 낭패를 당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성경의 저울에 올라서게 되면 나란 존재는 하나님 앞에서 죄인임을 발견하게 됩니다.

본문은 율법으로 구원 받을 수 없고, 오직 믿음을 통해서만 구원받을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믿음을 통해 구원을 받을 수 있는 원인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신 주님을 통해 은혜 받기를 기도합니다.

1. 믿음으로 구원 받은 아브라함(3:1-9)

바울은 갈라디아 성도들을 향해 폭탄을 퍼붓듯이 질책하였습니다.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눈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3:1). 바울은 먼저 십자가에서 구원하신 십자가의 복음을 전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못 박혀 죽으신 것은 이론이 아니라 역사적인 사실입니다. 그들은 이 사실을 바울의 전도를 통해 확실히 알았고 또 믿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율법을 지켜야 구원받을 수 있다는 이단의 꾐에 빠져 십자가의 믿음을 통한 구원을 믿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이런 그들을 어리석다고 책망했습니다. 그런 그들에게 한 가지만 묻겠다고 했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다만 이것을 알려 하노니 너희가 성령을 받은 것은 율법의 행위로냐 혹은 듣고 믿음으로냐 너희가 이같이 어리석으냐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이제는 육체로 마치겠느냐”(3:2-3). 바울은 너희가 언제 성령을 받았는가를 물었습니다.

그들이 성령을 받은 것은 율법의 행위로서가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바울이 전한 복음을 듣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성령을 받았습니다. 그들은 믿고 성령을 받아 죄 사함을 받았습니다. 그들은 믿고 성령을 받아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했습니다(고전 12:3). 그들은 믿고 성령을 받아 하나님의 자녀임을 확신했습니다. 그들은 믿고 성령을 받아 기쁨과 감격스러운 삶을 살았습니다. 그들은 믿고 성령을 받아 고난과 핍박도 이겼습니다(3:4-5). 이것은 그들이 숨길수 없는 사실이었습니다.

이제 바울은 믿음으로 구원 받은 사실을 아브라함의 예를 들어 설명했습니다(3:6). 하나님은 자식 하나 없어 낙심 중에 있는 아브라함을 이끌고 밖으로 나가 말씀하셨습니다. 하늘을 우러러 뭇별을 셀 수 있나 보라 또 그에게 이르시되 네 상속자가 이와 같으리라 아브라함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15:5-6).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믿었습니다.

우리 속담에 소도 언덕이 있어야 비빈다는 말이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현재 자식 하나 없습니다. 그는 늙은 할아버지였습니다. 그의 아내 사라는 경수가 끊겼습니다. 이성적으로 자녀를 낳는다는 것은 불가능했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네가 낳은 상속자를 통해 뭇별과 같은 많은 후손을 주시겠다는 말씀을 그대로 받아들였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이 말씀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고 믿는 믿음을 보시고 감동하여 의로 여기셨습니다.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하나님을 감동시켰습니다.

갈라디아서 31-9절에서 믿음이란 단어가 7번 나옵니다. 이를 볼 때 의란 행위로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믿고 순종하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내 능력과 내 의지와 내 의를 포기하고 말씀을 믿고 순종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인간 조건을 넘어서서 말씀을 믿고 순종하는 것입니다.

우리 또한 구원 받은 것은 내가 잘 나서 구원을 받고, 내가 도덕적으로 좀 의로워서 구원 받고, 내가 좀 훌륭해서 구원을 받은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구원을 받을 만한 조건이 하나 없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나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셨고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셨다는 것을 믿음으로 구원받았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내가 어떤 행위를 통해 구원을 받은 것으로 착각할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이런 생각을 합니다. “나도 못하는 주제에 누구한테 예수를 믿으라고 해”, “나는 부족해서 안 돼”, “나는 변변치 못해서 안 돼”, “나는 자격이 없어”.

이런 말을 아주 자연스럽게 합니다. 이런 사람은 겸손한 것처럼 느껴지지만 행위를 통해 구원을 받고자 하는 완전주의자요, 율법주의자입니다. 우리가 언제 완전한 적이 있었으며, 변변한 적이 있었습니까? 본래 우리는 구원 받을 자격이 없는 본질상 진노의 자녀들이었습니다(2:3).

그리고 우리는 이런 말을 무심코 내뱉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이 왜 그 모양이지?”, “집사가 왜 저 모양이지”, “목사가 왜 저러지그러면 우리는 할 말이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내가 예수님을 믿었으니 이만이나 하지, 안 믿었으면 더 형편없었을 것이야”. 우리는 수없이 의식과 무의식의 세계에서 행위를 통한 구원을 이야기합니다.

또 우리는 우리가 어떻게 받기만 하나 뭔가를 해야지 하는 체면의식이 있습니다. 체면도 율법주의의 유형입니다. 체면은 전형적인 유교주의에 기초한 믿음입니다. 누가복음 15장을 보면 집나간 탕자가 나옵니다. 그는 믿음으로 집으로 돌아와서 아버지가 베푸는 주연에 참석하여 먹고 즐겼습니다. 형은 동생의 뻔뻔스러운 모습을 보고 아버지께 대들었습니다. “아버지, 내게 언제 염소 새끼 한 번 잡아 준 적이 있습니까? 그런데 저런 탕자 같은 놈을 위해 잔치를 벌이다니 말이 됩니까?” 사실 형의 말이 맞습니다. 그러나 믿음이란 탕자처럼 자격이 없지만 하나님의 은혜로 먹고 마시며 기쁨을 누리는 것입니다.

기독교는 믿음의 종교입니다. 우리는 행위로 구원을 받은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십자가를 믿음으로 구원 받았습니다. 구원을 받았다는 것은 자유인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자유인이 되었다는 것은 매임에서 풀린 해방입니다. 이는 마치 새장에 갇혀있는 새가 새장을 나와 창공을 마음껏 나르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는 과거 죄의 노예였습니다. 이제 우리는 아무 공로 없이 믿음으로 구원을 받아 율법의 매임에서 풀려 자유인이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는 정죄의식, 완전주의, 유교적인 체면에서 벗어나 믿음으로 자유와 기쁨을 누려야 합니다. 믿음으로 구원 받은 사람의 첫 번째 복이 화평입니다(5:1).

2. 우리를 율법에서 속량하신 예수 그리스도(3:10-14)

인생을 진지하게 살려고 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를 막론하고 선행을 통해 구원을 받고자 합니다. 이것이 지상 모든 종교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이런 사람을 향해 말씀합니다. 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에 있나니 기록된 바 누구든지 율법 책에 기록된 대로 모든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니라”(3:10). 율법을 행함으로 구원받고자 수고하는 사람은 저주 아래 있다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아무도 율법을 행한 사람이 없기 때문이었습니다.

우리는 십계명에 대해 알고 있습니다. 십계명을 읽을 때마다 누가 감히 십계명을 다 지켰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우리 중에 그래도 최선을 다해 지켰다고 말할 수는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우리에게 네가 최선을 다했느냐?”고 묻지 않습니다. 성경은 누구든지 율법 책에 기록된 대로 모든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 있다고 했습니다.

또 우리는 이런 말을 할 수 있습니다. “지금은 헤매지만 그래도 한 때는 잘 지킨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누구든지 율법 책에 기록된 대로 모든 일을 항상이라고 말씀했습니다. 아홉 번 잘 하다가 한번 잘 못한 것, 인정하지 않습니다. 항상 지켜야 합니다.

또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그래도 그 일만은 끝내주게 했습니다. 이 부분만큼은 인정을 해주셔야지요. 그런데 내게 저주라니요?” 그런데 성경은 누구든지 율법 책에 기록된 대로 모든 일을행했는가를 말씀합니다. 10가지 중에 한 가지를 지키지 못해도 저주 아래 있다는 것입니다.

율법은 100%를 요구합니다. 물은 100도가 돼야 기체가 됩니다. 99.99도 액체입니다. 율법도 100 아니면 99.99점이나 0점이나 다 똑같이 처리합니다.

누가복음에 보면 부자 청년이 나옵니다. 그는 어려서부터 율법을 지키기 위해 많은 노력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는 예수님께 어떻게 해야 영생을 얻을 수 있는가를 진지하게 물었습니다. 이는 율법을 통해서는 영생을 얻을 수 없다는 고백이었습니다.

누구도 율법으로 구원을 받을 수 없습니다. 율법이 없는 이방인들은 양심을 통해 저주를 받습니다. 사람들은 양심대로 살면 된다고 합니다. 여러분들 중에 양심대로 산 사람이 있습니까? 양심에 손을 얹고 생각해 보시오. 우리의 내면은 위선과 거짓, 탐욕, 정욕, 이기심, 시기로 가득 차 있습니다. 이처럼 사람이 자기 행위로 의롭게 되고자 하는 것은 가증스러운 것입니다. 율법으로는 하나님 앞에 온전히 나아갈 수 없습니다.

율법으로 의롭게 되고자 하는 사람들은 결국 절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나는 안 돼.’ ‘내 한계는 여기까지야.’ ‘나는 구원과는 먼 사람이야.’ ‘저주가 내 머리 위에 있어.’ 율법으로 의롭게 될 수 없는 것은 자명합니다. 그래서 자신의 한계 앞에 절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절망하는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구원의 길을 열어 놓으셨습니다.

또 하나님 앞에서 아무도 율법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지 못할 것이 분명하니 이는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 하였음이라”(3:11).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 이를 일컬어 이신득의(以信得義), 행위로 구원을 받을 수 없지만 믿음으로 의에 이를 수 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께서 믿음을 보시고 의롭다고 칭하신다는 것입니다. 율법으로 구원을 받고자 했을 때에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진노의 관계, 원수의 관계, 심판의 관계, 저주의 관계였습니다.

율법의 요구는 율법을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입니다(3:12). 그런데 위에서 살펴본 대로 인간은 율법을 지킬 수 없었기 때문에 인간은 심판을 받고 저주를 받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것은 인간의 운명입니다. 율법의 저주 아래 있는 인간을 속량하시기 위해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저주를 받으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3:13). 나무에 매달아 죽이는 십자가형은 카르타고에서 민족반역자에게 사용하는 사형도구였습니다.

십자가형이 얼마나 참혹하지 1,000번 까무러친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십자가형은 1,000번의 죽음의 고통을 겪는 것입니다. 십자가형틀에 못을 박을 때에도 손바닥이 아니라 신경이 다 모여 있는 손뼈에다 박습니다. 십자가형은 이렇게 잔인합니다.

십자가형이 너무 잔인하기 때문에 로마가 이 사형 제도를 받아들일 때 아무리 극악무도해도 로마시민은 십자가형으로 죽을 수 없다고 했습니다. 그들은 십자가를 치욕, 저주, 패배, 어둠이기 때문에 십자가 문양은 로마 사람들과는 영원히 아무 상관없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똑같은 죄를 지었는데도 로마 시민권자인 바울은 참수형을 당했고, 로마 시민권을 갖지 못했던 베드로는 십자가형을 받았습니다. 베드로는 사형집행인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어찌 주님과 같은 모습으로 죽을 수 있습니까? 거꾸로 십자가를 매달아 달라.” 그서 베드로는 거꾸로 십자가에 못 박혔습니다.

안드레도 십자가에 못 박힐 때 사형 집행인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도 감히 주님처럼 그 영광의 십자가에 달릴 수가 없다. 어떻게 죄인이 주님 모습을 흉내 낼 수 있나. 십자가를 엇비슷하게 뉘어 달라.” 그래서 X 자가 되었습니다. 지금도 X자 십자가를 St. Andrew's Cross라고 합니다.

초대 교회에 어떤 사람들에게는 십자가가 부끄러웠습니다. 그리고 십자가는 어떤 사람에게는 미련한 것이었습니다. 어떤 사람들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었습니다. 십자가는 패배와 저주의 상징이었습니다. 그 저주는 그냥 저주가 아니라 참혹한 저주였습니다.

그런데 그리스도께서 저와 여러분을 위하여, 아니 만민을 위하여 참혹하게 저주를 받으셨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이렇게 예언했습니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53:6).

예수님은 아무 죄가 없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저주 받을 이유가 없으셨습니다. 그런데 죄 없으신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저주를 받으셨습니다. 주님께서 골고다 언덕에 올라가실 때 로마 군인들의 무서운 채찍이 예수님의 등을 후려치었습니다. 십자가에서 손과 발목에 못을 박았습니다. 머리 위에는 가시관이 씌워졌습니다. 옆구리에 창에 찔려 피가 흘렀습니다.

마침내 예수님은 우리 죄를 위하여 십자가의 저주를 받으셨습니다. 이는 죄 아래 있는 인간을 속량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속량이란 노예시장에서 사용되는 단어로, 돈을 대신 값아 주고 노예를 해방시키는 것을 뜻합니다. 노예의 일정한 몸값을 지불하면 노예의 이마에 찍힌 종의 마크가 없어지고 자유인이 됩니다.

당시 노예가 5,000만 명이나 되었습니다. 우리는 노예들이 얼마나 잔인하게 학대를 받고 얼마나 고문을 받으며 얼마나 비참하게 살았는지 여러 역사적인 사건을 통해 익히 알고 있습니다. 이 노예들이 자유를 얻었다고 상상해 보십시오. 성경은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라”(8:34)고 했습니다.

작가 김홍신은 삶을 인간시장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보실 때 이 시대는 인간시장이 아니라 노예시장입니다. 사람들은 각기 자기는 자유인이라고 말하지만 자유인은 한 명도 없습니다. 특히 자본주의 국가에 사는 우리 모두는 돈에 팔려 살아가는 노예입니다. 기회가 주어지면 돈을 많이 주는 기업으로 옮기려고 합니다. 특히 재벌에 팔려 살아가고 있습니다. 겉으로 보면 사람들은 자유를 누리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치열한 생존경쟁에 떠밀려 진정한 자유를 누리지 못하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누구를 막론하고 정욕의 노예, 물질의 노예, 미움과 시기심의 노예, 두려움의 노예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성경은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우리도 전에는 어리석은 자요 순종하지 아니한 자요 속은 자요 여러 가지 정욕과 행락에 종 노릇한 자요 악독과 투기를 일삼은 자요 가증스러운 자요 피차 미워한 자였으나”(3:3). 우리는 인간시장이 아니라 노예시장에서 자유롭지 못한 삶을 살고 있습니다.

율법은 사람을 정죄합니다. 죄는 지독하여 피를 요구합니다. 피 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습니다(9:22). 그런데 짐승의 피는 일시적이고 제한적입니다. 이는 장차 오실 예수 그리스도 어린양의 모형이었습니다. 마침내 예수님은 죄인들을 속량하시기 위해 십자가에 단번에 죽으심으로 율법과 죄의 저주에서 우리를 해방시키셨습니다.

누구든지 나를 위해 저주의 십자가로 지신 예수님을 믿으면 내 저주는 예수 그리스도의 저주로 옮겨집니다. 가계에 흐르는 저주가 끊겨집니다. 내게 내린 저주가 예수님을 믿는 순간 끊어집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을 때 나는 저주의 근원이 아니라 복의 근원, 복의 통로가 됩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이전 것은 지나가고 새것, 새로운 존재, 새로운 피조물이 됩니다. 따라서 가계에 저주가 있을 수 없습니다. 이제 저주는 나와 상관없습니다.

우리 속에 저주의식이 혹 있지는 않습니까? 나는 왜 이렇게 재수가 없어? 나는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왜 이렇게 되는 것이 하나도 없어? 무거운 억눌림! 내일 어떤 불길한 일이 나를 덮칠지 모르는 불안! 이런 저주의식을 가지신 분이 있습니까?

이런 저주에서 어떻게 벗어날 수 있습니까? 선한 행실로는 저주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내 스스로 내 저주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이는 마치 늪에 빠진 사람이 혼자 그 늪을 빠져나오기 위해서 몸을 움직이면 움직일수록 그 늪 속 깊은 곳으로 더 빨리 빠져버리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밖에 있는 사람이 큰 막대기를 주어서 그 막대기를 붙잡으면 올라올 수 있습니다.

그 모든 저주를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저주를 받으셨습니다. 주께서 나의 저주가 되셨습니다. 이 예수님을 만나십시오. 이 예수님을 만나고 싶지 않습니까? 예수님의 십자가를 붙드십시오. 나의 모든 저주를 십자가에 옮겨놓으십시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바라볼 때마다 내 모든 저주가 십자가에서 끊어졌음을 믿으십시오. 내 저주는 예수님의 십자가로 옮겨졌음을 믿으십시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 받으셨습니다.

이 시간 내 열심과 선행으로 죄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던 데서 믿음으로 십자가로 옮기십시오. 그리고 내 저주가 주님께 전가된 것을 믿으십시오. 찬양하십시오. 따라서 하겠습니다. 십자가를 바라보는 즉시 내 저주는 사라졌다. 나의 저주는 주님께로 옮겨졌다. 내 저주는 끝났다. 나의 저주를 짊어지신 주님을 찬양합니다. 이제 희망과 자유와 기쁨, 그리고 매일 하나님께서 주실 것을 기대하며 사시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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