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 이사야서 1:18-31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의 죄가 주홍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같이 붉을지라도 양털같이 희게 되리라”(1:18).

 

우리는 난해한 그림을 일컬어 피카소의 추상화와 같다고 합니다. 지난해를 회상하면 우리의 머리로 이해할 수 없는 일을 많이 경험했습니다. 47일 윤 일병 치사사건, 416일 세월호 침몰사건, 갑의 횡포의 상징인 조현아 땅콩리턴사건, 국제적으로는 IS의 무자비한 참수사건, 에이즈와 더불어 무서운 에볼라 전염병의 창궐 등, 우리는 이런 사건을 접할 때마다 이해가 안 되고 해석이 안 됩니다. 이처럼 주님도 이스라엘의 배은망덕이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한탄하셨습니다.

소는 그 임자를 알고 나귀는 그 주인의 구유를 알건마는 이스라엘은 알지 못하고 나의 백성은 깨닫지 못하는도다 하였도다 슬프다 범죄한 나라요 허물 진 백성이요 행악의 종자요 행위가 부패한 자식이로다 그들이 여호와를 버리며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를 만홀히 여겨 멀리하고 물러갔도다”(1:3-4).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이런 그들에게 구원의 손길을 베푸셨습니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의 죄가 주홍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같이 붉을지라도 양털같이 희게 되리라”(1:18).

우리는 본문을 통해 오라 우리가 변론하자고 하시는 주님의 초청의 음성을 듣고 순종하여 구원받고 땅의 아름다운 소산을 먹을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1. 눈과 양털같이 희게 하리라(1:18-20).

우리는 누군가로부터 초청을 받아본 적이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초대는 마음이 기쁘고 기대를 갖게 합니다. 그런데 어떤 초청은 부담스럽습니다. 관공서에서 오라는 초대장은 일단 우리의 마음을 무겁게 합니다. 특히 검찰청과 경찰서, 그리고 세무서에서 출두하라는 초청장은 우리를 심히 부담스럽게 합니다.

그런데 누가 결혼한다는 초청장은 우리의 마음을 즐겁게 합니다. 그런데 요즈음에는 결혼 초청장이 부담이 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결혼 초청장은 기쁩니다. 한편 장례소식을 접하게 되면 슬퍼집니다. 이처럼 어떤 초청은 기쁨과 영광이 되지만 어떤 초청은 심적 부담이 되기도 합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에 보니 여호와의 놀라운 초청이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의 죄가 주홍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같이 붉을지라도 양털같이 희게 되리라”(1:18).

성경에 오라는 하나님의 초청이 구약에 200, 신약에 400번이 나옵니다. 구약에서 주님의 초청의 대표적인 말씀이 본문과 이사야서 55:1과 호세아서 6:1입니다.

오호라 너희 모든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 먹되 돈 없이, 값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 주실 것임이라.”

그리고 신약 성경은 마태복음 11:28입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하나님은 공의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죄인과 함께 하실 수 없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공의의 하나님이기 때문에 반드시 죄를 심판하십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초청하십니다. 그리고 변론하자고 하십니다. 이는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여호와스스로 존재하시는 분’, ‘완전하신 분’, ‘구속자란 뜻입니다. 이를 볼 때 하나님은 전에도 계시고 지금도 존재하시고 영원히 나와 함께 하시는 구원과 사랑의 하나님이십니다.

변론하자’(Let us reason together; NIV)란 이성적으로 옳고 그름을 한번 따져보자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권위적이지 않으십니다. 일방적이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대화를 통해 죄를 깨우치고자 하시는 인격적인 분이십니다. 인간은 죄를 짓고도 그 잘못을 모릅니다. 오히려 죄를 짓고 인상을 쓰고 눈을 부릅뜨고 대드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그리고 죄를 은폐하고 변명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대화를 통해 그들의 잘못을 깨우쳐 주고자 하셨습니다.

만일 그들이 죄를 깨닫고 회개하면 주홍같은 죄라 할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지게 됩니다. 그리고 진홍 같이 붉을지라도 양털같이 희게 되리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에서 주홍과 눈, 진홍과 양털이 대조적입니다. 죄는 주홍 같고 진홍 같습니다. 여기에서 죄가 얼마나 추한가를 알 수 있습니다. 반면에 여호와께 나오면 죄 사함 받고 눈과 같이 희어지고 양털같이 희게 됨을 알 수 있습니다.

성경은 죄가 얼마나 더럽고 추한가를 곳곳에 기록하고 있습니다. 특히 성경은 죄를 나병으로 비유하였습니다. 나병은 아름다운 얼굴을 보기 흉한 모습으로 바꾸어 놓습니다. 이처럼 죄도 아름다운 하나님의 형상을 파괴합니다. 그래서 죄지은 인간은 음란합니다. 사랑보다는 정죄, 감사보다는 원망과 불평, 겸손보다는 교만, 용서보다는 미움, 긍정보다는 부정, 진실보다는 거짓됩니다. 죄는 사람의 마음과 양심, 그리고 인격과 영혼을 추하게 만듭니다.

그리고 나병은 신경을 파괴하기 때문에 처음에는 고통을 느끼다가 조금 지나면 전혀 고통을 느끼지 못하게 됩니다. 이처럼 죄도 처음 지을 때는 죄의식이 듭니다. 양심에 찔림이 있습니다. 그러나 반복해서 죄를 짓다 보면 죄에 대한 감각이 무디어 아예 없어집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용감하게 죄를 짓고 아무 문제가 없는 듯이 살아갑니다. 그러나 고통이 없다고 해서 아무 문제가 없는 것이 아닙니다. 실상은 보이지 않지만 그 내면은 죄로 썩어가고 악취가 납니다. 죄는 사람을 추하게 만듭니다. 맑고 밝은 얼굴이 추해집니다. 아무리 겉모양을 꾸미고 향수를 뿌려도 죄가 풍기는 악취와 더러움은 숨길 수 없습니다.

나병은 사람들과 격리하게 만듭니다. 왜냐하면 전염이 되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사람이 죄를 짓게 되면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집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지게 되면 생명의 근원에서 끊어지게 됩니다. 따라서 죄지은 인간은 꽃병에 꽂혀 있는 꽃과 같습니다. 살아 있으나 죽은 인생입니다. 또 죄는 인간 상호 간도 단절시켜 서로 미워하고 분열하고 다투게 합니다.

이처럼 나병이 처음에는 대수롭지 않은 것 같지만 그 결과가 치명적이듯이 죄도 처음에는 별것 아닌 것 같지만 나중에는 치명적인 결과를 가져옵니다. 성경은 죄의 삯은 사망이요, 사망 이후에는 심판이 있다고 말씀합니다. 이처럼 죄는 인간을 죽음과 영원한 파멸에 이르게 하는 치명적입니다.그런데 문제는 우리 모두가 다 죄인이라는 사실입니다. 성경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3:10).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3:23).

우리 모두는 죄를 범하여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는 모든 사람들 속에 들어 있는 죄인입니다.

세상에 무서운 것들이 많지만 죄처럼 무서운 것은 없습니다. 죄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면 죽어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하는 것은 물론이고, 이 땅에서도 천국을 누릴 수 없습니다. 살아있으면서 천국을 누리지 못한다면 이는 살아 있으나 실상은 죽어 있는 삶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세상에 그 누구도 우리의 죄를 해결해 줄 수 없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죄 문제를 해결해 주지 못하는 사람에게 죄를 고백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잠시 마음의 위안은 가져올지 모르지만 의미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천주교에서 신부에게 고해성사를 하는 것은 아무 의미 없습니다.

그러면 누가 주홍 같고 진홍 같이 붉은 죄를 해결할 수 있습니까? 예수님만이 우리의 죄를 사해주실 수 있습니다.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23:34).

예수님은 자기를 십자가에 못 박는 저들을 욕하거나 저주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오히려 저들을 사하여 달라고 기도하셨습니다. 십자가상의 일곱 마디 가운데 첫 번째는 자기를 죽이는 저들을 위한 기도입니다.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셨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화평의 십자가입니다.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 법조문으로 된 계명의 율법을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또 오셔서 먼 데 있는 너희에게 평안을 전하시고 가까운 데 있는 자들에게 평안을 전하셨으니”(2:14-17).

인간은 죄로 인해 하나님과 원수 관계로, 하나님 앞에 나갈 수 없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과 교통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생명에서 끊어지게 되었습니다. 죄로 인해 인간 상호간에도 장벽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서로 불신하고 증오합니다. 예수님은 이런 인간을 불쌍히 여기시고 십자가에서 모든 죄를 용서하여 주셨습니다. 중간에 막힌 담을 허셔서 하나로 만드셨습니다.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셨습니다. 원수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셨습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도 화목하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시고, 사람과도 화목하게 하셨습니다.

인간 사이에 가장 심각한 문제는 용서가 없는 것입니다. 용서가 없기 때문에 국가 간의 분쟁, 남북 간의 냉전, 동서의 지역 갈등 등이 생깁니다. 조금만 용서하면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데 그렇지 못합니다. 부부간의 갈등도 서로 용서하면 되는데 그렇지 못해 가정이 깨집니다.

그런데 우리 속담에 은혜는 물에 새기고, 원한은 돌에 새긴다는 말처럼 남을 용서한다는 것이 그렇게 말처럼 쉽지 않습니다. 내게 상처와 고통을 준 사람을 용서한다는 것은 그리 쉽지 않습니다. 배반한 사람을 용서한다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나의 자존심과 약점을 짓밟은 사람을 용서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용서는 그만 두고 인간은 당대에 원수를 갚지 못하면 자식에게 유언을 남겨서라도 꼭 원수를 갚고자 합니다. 이처럼 우리의 힘으로 남을 용서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러나 십자가에서 내 죄를 용서하신 주님의 용서의 사랑을 영접할 때에 남을 용서할 수 있습니다. 벤허란 영화를 보면 십자가의 용서의 사랑은 벤허의 손에서 복수의 칼을 놓게 했습니다. 이처럼 십자가는 용서와 화평의 십자가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왜 교회에 다니십니까? 우리는 왜 주일마다 교회에 나아와 예배를 드리고 적지 않은 물질을 헌금하고 이런 저런 봉사를 하십니까? 예수님을 믿는 목적이 무엇입니까? 어떤 분은 습관적으로 별 생각 없이 다니는 경우도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사귐을 갖기 위해 교회에 올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복을 받기 위해 올 수도 있습니다.

이런 이유로 신앙 생활하는 것이 잘못된 것이 아닙니다. 좋은 습관은 좋은 것입니다. 습관을 좇아 교회에 나오고 예배드리고 기도하는 것은 나쁜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교회 안에서 좋은 사귐을 가지고 봉사하고 활동하는 것도 좋은 일입니다. 교회의 기능 중에 하나가 사귐(코이노니아)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잘 믿어서 건강하고 복을 받겠다는 것도 잘못된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이런 것들이 예수님을 믿고 교회를 다니는 이유의 전부는 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교회를 다니는 목적은 속죄와 구원입니다. 다윗은 하나님을 믿음으로 많은 복을 받았습니다. 그는 양똥치는 목동에 불과했습니다. 목동은 재판정의 증인으로도 설 수 없는 신분이었습니다. 거기다가 그는 말째였습니다. 그런 그가 하나님의 부르심으로 위대한 왕이요, 장군이요, 목자요, 시인이요, 음악가였습니다. 그는 문무예술에 뛰어난 전인적인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또한 여인들에게도 인기가 있었고, 통일 이스라엘의 왕이었습니다. 그는 세상에 아무것도 부족함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 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23:1). “내 잔이 넘치나이다”(23:5)라고

그런 그가 치명적인 죄를 지었습니다. 그것은 충신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를 간음한 것입니다. 그러고는 죄를 은폐하기 위해 우리아를 험한 전쟁터에 보내 무고히 피 흘려 죽게 했습니다. 그 후 다윗은 죄가 주는 고통으로 인해 악몽을 꾸고 심한 괴로움에 시달렸습니다. 그러다가 나단 선지자의 책망을 받고 눈물로 죄를 회개했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회개를 보시고 용서해 주셨습니다. 다윗은 주님으로부터 용서를 받은 후에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허물의 사함을 받고 자신의 죄가 가려진 자는 복이 있도다”(32:1).

허물이란 하나님의 법을 어기는 것이요, ‘란 하나님의 뜻을 어기는 것입니다. ‘사함을 받다란 치워버린다는 뜻입니다. 쓰레기가 쌓이면 악취가 나고 보기에 좋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런 쓰레기를 깨끗이 치우면 마음이 상쾌해집니다. 이와 같이 우리가 지은 죄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다 할지라도 하나님이 깨끗이 치워주십니다. 또한 가리어지다란 눈에 띄지 않게 해주신다는 뜻입니다.

죄는 뼈를 쇠하게 하는 고통과 영혼을 질식하게 만듭니다. 죄는 자유와 기쁨을 앗아갑니다. 죄에서 벗어나고자 몸부림을 치면 칠수록 죄의 세력은 더 강하게 우리를 옭아맵니다. 죄는 인격과 인간관계와 가정을 파괴합니다. 그러나 믿음으로 십자가에서 보배 피를 흘리신 예수님을 믿으면 모든 죄가 흰 눈처럼 양털처럼 희게 됩니다. 이 때의 기쁨을 외양간에서 나온 송아지처럼 뛰게 됩니다. 그래서 다윗은 복 중에 복은 허물의 사함을 받고 자신의 죄가 가려진 자는 복이 있도다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속죄와 구원이 가장 큰 복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교회에 다니고 예수님을 믿은 원인 중의 원인과 동기 중의 동기가 속죄와 구원이 되어야 합니다. 다른 종교도 믿으면 복을 받는다고 합니다. 그리고 다른 종교에도 코이노니아가 있습니다. 이슬람의 라마단은 코이노니아의 극치입니다. 그러나 어느 종교에도 속죄와 구원은 없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속죄와 구원이 복이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목적은 구원과 속죄입니다. 우리를 좀 더 건강하게 하시려고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것이 아닙니다. 우리를 좀 더 부요하게 하시려고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것이 아닙니다. 우리를 좀 더 형통하게 하시기 위하여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주홍같이 붉고 진홍같이 붉은 죄를 사하시고 구원을 주시기 위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습니다.

우리는 혹시 가진 재물이 없다고 할지라도, 혹시 건강하지 못할지라도, 혹시 하는 일이 형통하지 못할지라도 주님으로부터 받은 구원과 속죄함으로 인해 감격하여 감사 찬양할 수 있는 성숙한 분들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그리고 누가 왜 예수님을 믿고 교회를 다니느냐고 묻는다면, 예수님을 믿어서 받은 복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서슴없이 구원과 속죄함이라고 대답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하나님은 은혜의 하나님이십니다. 사랑의 하나님이십니다. 용서의 하나님이십니다.

나 행한 것 죄뿐이니 주 예수께 비옵기는 나의 몸과 나의 맘을 깨끗하게 하옵소서 물가지고 날 씻든지 불가지고 태우든지 내 안과 밖 다 닦으사 내 모든 죄 멸하소서(새찬송가 274).

2. 이제는 살인자들뿐이로다(1:21-31).

이사야서 1:21-31절은 유다의 죄악과 하나님의 심판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초청해도 그들은 응하지 않았습니다. 그 때 하나님은 그들을 무엇이라 말씀합니까? 신실하던 성읍이 창기가 되었습니다. 정의와 공의가 있었던 곳이 살인자들로 가득했습니다(1:21).

과거 그들은 하나님께 대한 믿음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사람들에게도 신실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창기가 되었습니다. 창기란 여러 남편을 둔 사람을 말합니다. 그들은 여호와 하나님을 버리고 각종 우상을 섬겼습니다. 예배당에 나오면서 점쟁이를 찾고, 사주와 관상을 보고 택일을 합니다. 이는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창기와 같은 자들입니다. 참된 신자는 공의와 정의가 있어야 합니다. 공의와 정의가 없을 때 정실이 생기고 각종 부정과 부패가 심화되는 것입니다.

이사야는 이런 절망적인 시대에 어떻게 이상을 볼 수 있었습니까? 이사야서 6장을 보면 그도 하나님을 원망하고 세상을 원망했습니다. 그는 타락해가는 유다를 볼 때 분통이 터졌습니다. 술과 탐욕의 노예가 되는 젊은이들을 바라볼 때 안에서 열불이 났습니다. 그리고 정숙하지 못하고 창기와 같은 여인네들을 볼 때 속에서 저주가 흘러 나왔습니다. 그리고 이런 자들을 내버려두시는 하나님이 원망스러웠습니다. 그는 자신을 바라볼 때, 시대를 바라볼 때 희망이 없었습니다.

그런 중에 그는 성전을 찾았습니다. 그는 성전에 들어가 엎드려 기도했습니다. 그 때 그는 거룩하시고 영광스러운 만군의 여호와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그 때 그는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임한 놀라운 비전을 보았습니다. 이처럼 우리가 하나님의 비전을 보려면 거룩하시고 전능하신 만군의 여호와 하나님께 엎드려야 합니다. 그 때 그는 장차 임할 하나님의 심판과 메시아를 통한 만유 회복과 장차 임할 새 땅과 새 하늘을 볼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IMF때보다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습니다. 이 때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합니까? 우리는 거룩하시고 영광스러운 만군의 여호와 하나님께 나아가 무릎을 꿇고 회개해야 합니다. 저는 이 시대 문제를 놓고 기도하는 중에 놀라운 비전을 보았습니다. 그것은 시대 문제를 섬길 인재를 양성하는 것이었습니다.

지금 경제공황에 대한 대비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인재공황에 대비하여 인재를 양성하는 것입니다. 이 나라를 이끌고 갈 크리스천 인재양성이 절실히 필요로 합니다. 청문회를 보면 한국의 지도자급들이 모두가 법을 어겼습니다. 이런 시대에 크리스천 리더를 양성하여 이 땅에 공의와 정의를 실현해야 합니다.

우리는 여호와 하나님의 초청의 음성을 듣고 하나님께로 나가야 합니다. 그 때 죄 사함을 받고 아름다운 땅에서 나는 소산을 먹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크신 비전을 보게 됩니다. 아멘.

엮인글 :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395 2017년 신년 초대교회 행 2장 42 운영자 2017-01-28 371
394 2017년 신년 믿음과 기도 막 11장 22 운영자 2017-01-21 459
393 2017년 신년메시지 우리가 먼저 구할 것은 마 6장 운영자 2017-01-14 603
392 2017년 신년메시지 그 안에 골로새서 2: 6-7. 3:1-4 운영자 2017-01-02 649
391 2016년 성탄3강 하나님의 사랑 운영자 2016-12-31 403
390 2016년 성탄1강 큰 빛으로 오신 예수님 마 4:12-17 운영자 2016-12-17 498
389 고후 제8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다 고후 12장 운영자 2016-12-04 582
388 고후 제7과 주 안에서 자랑하는 자 고후 10장 운영자 2016-12-03 610
387 추수감사예배(2) 범사에 감사하라 살전 5:16-18 운영자 2016-11-26 687
386 추수감사예배(1) 눈물로 씨를 뿌리는 자의 기쁨(시 126:1-6) 운영자 2016-11-18 544
385 고후 제6과 힘에 지나도록 자원하여 연보를 드리는 마게도냐 교회들 고후 8장 운영자 2016-11-12 777
384 고후 제5과 화목하게 하는 직분 고후 5장 운영자 2016-10-23 731
383 고후 제4과 질그릇에 담긴 보배 고후 4장 운영자 2016-10-11 806
382 고후 제3과 새언약의 일꾼 고후 3장 운영자 2016-10-11 1162
381 고후 제2과 그리스도의 향기 고후 2장 운영자 2016-10-01 931
380 고후 제1과 위로의 하나님 고후 1장 운영자 2016-09-24 1296
379 고전 제11과 깨어 믿음에 굳게 서라 고전 16장 운영자 2016-09-17 745
378 고전 제10과 사랑이란 고전 13장 운영자 2016-09-06 870
377 고전 제9과 성령의 은사의 역할, 다양성과 통일성(고전 12장) 운영자 2016-08-28 1217
376 고전 제7과 성경에 나타난 결혼진리(고전 7장) 운영자 2016-08-14 933

일용할 양식

예배 안내

  • 주일 오전 예배 - 오전 11:00
  • 주일 오후 예배 - 오후 3:30
  • 어린이 예배 - 오전 11:00

대학마을교회 개척교회

우남식 목사님의 저서


    전도서에서 만난 복음
    (퍼플,2023)

      요한복음에서 만난 예수님
      (퍼플,2022)

        요한계시록에서 만난 복음
        (지식과 감성,2021)

          예레미야에서 만난 복음
          (지식과감성,2021)

            데살로니가전·후서에서 만난 복음
            (지식과감성,2020)

              이사야에서 만난 복음
              (지식과감성,2019)

                대학선교와 세계선교를 향한 권서행전
                (지식과감성,2019)

                  야고보서에서 만난 복음
                  (지식과감성,2017)

                    옥중서신에서 만난 복음
                    (지식과감성,2016)

                      행복과 긍정심리
                      (시그마 프레스,2015)

                        성심리
                        (시그마 프레스,2015)

                          마가복음에서 만난 예수님
                          (킹덤북스,2014)

                            사도행전에서 만난 복음
                            (생명의말씀사,2013)

                              로마서에서 만난 복음
                              (생명의말씀사,2012)

                                창세기에서 만난 복음
                                (생명의말씀사,2011)

                                    저서 구입연락처

                                    • 010-8215-7966
                                      안은경
                                    • 우리은행
                                      1006-601-218050
                                      대학마을교회

                                    Tiananmen Square protests, China Democracy, 天安門 天安门 法輪功 李洪志 Free Tibet 劉曉波, 热比娅·卡德尔, 熱比婭·卡德爾