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제48강목자 바울

조회 수 2303 추천 수 0 2012.07.14 06:37:34
사도행전 제 48 강(20:1-25)

목자 바울

“유대인과 헬라인들에게 하나님께 대한 회개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을 증언한 것이라”(행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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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예수님을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으면 이제 어떤 삶을 살아야 합니까? 우리는 바울의 밀레도의 고별 메시지에서 우리의 삶이 어떠해야 되는가를 배우게 됩니다. 바울은 겸손과 눈물, 인내로 주님을 섬겼습니다. 그리고 바울은 하나님께 대한 회개와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을 전했습니다. 그는 복음을 복음 전하는 사명을 생명보다 더 귀히 여겼습니다. 본문을 통해 바울의 목자상을 배우기를 기도합니다.

첫째, 졸음을 이기지 못하여(행 20:1-16)

바울은 에베소에서 소동이 진정되자 마게도냐로 건너갔습니다. 바울은 마게도냐에서 빌립보와 데살로니가 그리고 베레아 교회를 심방하였습니다. 바울은 제자들을 권면하고 헬라로 가서 3개월간 머물렀습니다. 그는 헬라에서 배로 수리아에 가고자 했지만 유대인들이 바울을 해하려 한다는 소식을 듣고 마게도냐를 거쳐 드로아에서 7일간 머물렀습니다. 아시아까지 동행한 일행은 바울 일행보다 먼저 드로아로 가서 기다렸습니다.

바울은 드로아에서 마지막 날 밤 늦도록 말씀을 전했습니다. 바울은 이 시간이 지상에서 그들을 만나는 마지막 시간으로 보았습니다(행 20:38). 그래서 바울은 불을 환하게 켜놓고 밤늦게까지 임종을 앞둔 부모가 자녀들에게 유언하는 심정으로 말씀을 전했습니다. 이런 중요한 시간에 유두고가 창문에 걸터앉아 말씀을 듣다가 떨어져 죽는 사건이 생겼습니다. 사도행전 20장 9절을 보겠습니다. “유두고라 하는 청년이 창에 걸터앉아 있다가 깊이 졸더니 바울이 강론하기를 오래 하매 졸음을 이기지 못하여 삼층에서 떨어지거늘 일으켜보니 죽었는지라.” 유두고는 노예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가 왜 졸았을까요?

그가 노예기기 때문에 하루 종일 주인을 섬기고 피곤한 채 밤이 늦도록 말씀을 듣다가 졸지 않았나 생각이 듭니다. 아니면 바울이 전하는 메시지의 심각성을 깨닫지 못해 졸지 않았다 생각이 듭니다. 아니면 말씀을 들으며 딴생각을 하지 않았나 생각이 듭니다. 그런데 성경은 졸음을 이기지 못해 삼층에서 떨어져 죽었다고 했습니다. 그는 졸음을 이기기 위해 무척 애를 썼던 것 같습니다. 그는 꼬집어 보기고하고, 때려도 보기도 하고, 머리를 흔들어보기고 했습니다. 그런데 졸음을 이길 수 없었습니다. 그는 누르는 눈까풀을 들어 올릴 힘이 없었습니다. 그는 도저히 졸음을 참을 수 없어 창문을 열고 찬바람을 쐬면 될까 싶어 문을 열고 창틀에 걸터앉아 있다가 일이 생겼습니다.

그러나 예배 시간이나 성경 말씀을 공부하는 시간에 조는 것은 영적인 문제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깨어 있으라고 하셨습니다(막 13:28-37). 조는 것은 말씀에 집중하지 않음에서 오는 문제입니다. 집중하지 않는 것은 다 안다는 생각에서 비롯됩니다. 이런 사람들은 졸다가 결론만 듣고자 합니다. 그리고 좀 교만한 사람은 서론만 듣고 다 알았다며 좁니다. 그리고 딴 생각하며 들으면 문맥이 이어지지 않아 졸기도 합니다.

말씀은 처음부터 끝까지 집중하여 듣되 광고까지 들어야 합니다. 마음과 생각과 눈과 귀를 다 동원하여 집중해서 들어야 합니다. 중요한 것은 메모를 하며 들어야 합니다. 집중은 훈련입니다. 존다는 것은 생각부터 조는 것입니다. 그 태도가 조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떨어질 위험이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정신을 집중하고 온 마음으로 들어야 합니다. 그 때 시험에서 이길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가서 보니 유두고가 죽어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웅성거리고 난리가 났습니다. 그때 바울은 설교를 중단하고 아래층으로 내려갔습니다. 바울은 떨어진 청년을 안고 기도하니 유두고가 다시 살아났습니다. 유두고가 살아나자 거기에 모인 사람들이 크게 위로가 되었습니다.

둘째, 바울의 목자 자세(행 20:17-19)

바울은 예루살렘의 기근을 위하여 이방 교회가 구제 헌금한 것을 오순절 안에 전달하기 위해 드로아에서 가장 빠른 방법인 배편으로 밀레도에 도착했습니다(행 20:13-16). 바울은 밀레도에 도착하여 에베소 장로들을 초청하여 장로들에게 고벨 메시지를 전했습니다(행 20:17). 바울은 장로들에게 3년 동안 에베소 교회를 내가 어떻게 섬겼는가는 너희들이 잘 알것이라고 했습니다. “아시아에서 들어온 첫날부터 지금까지 내가 항상 너희 가운데서 어떻게 행한 것을 너희도 아는 바니”(행 20:18). 바울은 에베소에서 말씀을 말로만 전하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생활 속에서 삶을 보여주었습니다.

우리는 입으로만 신앙생활을 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의 삶이 신앙고백이 되어야 합니다. 특히 자녀들에게 삶을 보여 주어야 합니다. 지금 한국 교회가 마이너스 현상을 놓고 걱정을 많이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걱정할 것이 없습니다. 믿는 사람들의 삶이 신앙고백이 되면 됩니다. 우리의 삶이 신앙고백이 되면 우리의 매력적인 삶을 보고 불신자들이 교회로 몰려들 것입니다.

바울이 어떻게 교회를 섬겼습니까? 사도행전 20장 19절을 보겠습니다. “곧 모든 겸손과 눈물이며 유대인의 간계를 인하여 당한 시험을 참고 주를 섬긴 것과” 바울은 겸손과 눈물과 시험을 참고 주님을 섬겼습니다. 주님을 섬기는 구체적인 삶은 주님의 양떼들을 섬기는 것입니다. 바울은 겸손과 눈물과 인내로 주님을 섬겼습니다. 이것은 목자의 기본자세입니다.

첫째는 겸손으로 섬겼습니다.

바울은 모든 겸손으로 섬겼습니다. 바울은 본래 교만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그가 겸손하신 예수님을 만난 후 겸손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하늘의 모든 영광을 버리고 육신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죄인들을 겸손하게 섬기셨습니다. 예수님은 손가락질하는 이기적인 세리들과 창기들을 겸손히 섬기셨습니다. 예수님은 시기심이 가득 찬 제자들의 발을 겸손히 씻어주셨습니다. 예수님은 겸손의 본이십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마 11:29). 예수님은 겸손하십니다. 겸손하신 예수님을 배우면 누구나 겸손한 사람이 됩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님의 겸손을 다음과 같이 묘사했습니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2:6-8).

하나님은 겸손한 사람을 사용하십니다. 스스로 강하다고 하는 사람, 스스로 잘 안다는 교만한 사람들은 절대로 쓰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섬김의 자리, 겸손한 자리에 앉은 이를 쓰시고 크게 복을 주십니다. “그 작은 자가 천명을 이루겠고 그 약한 자가 강국을 이룰 것이라 때가 되면 나 여호와가 속히 이루리라”(사 60:22). 하나님의 능력은 겸손에서 나옵니다. 하나님은 뭔가를 내세우고 자신을 내세우는 자와 함께 하시지 않습니다.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핍박과 곤란을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할 그 때에 곧 강함이니라”(고후 12:10). 내가 가장 약할 때 하나님의 능력이 나옵니다.

모세가 초기에 자신의 힘과 지혜와 능력을 의지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런 모세를 40년간 광야훈련을 시키셨습니다. 하나님은 철저하게 자기를 의지하던 것들을 깨시고 그런 후에 그를 사용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어깨에 힘이 들어가고 자신의 힘으로 뭔가를 하겠다는 사람을 쓰시지 않습니다. 주님의 일을 하려는 사람은 예수님의 겸손한 마음을 배워야 합니다.

겸손은 기도로 나타납니다. 게으른 사람이 기도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교만한 사람이 기도하지 않습니다. 내 능력으로 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기도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겸손한 사람에게 하늘 문을 여시고 길을 열어 주십니다. 못생긴 나무가 선산을 지킨다는 말이 있듯이 하나님은 겸손하고 낮아진 사람을 사용하여 하나님 나라를 이루시고 지켜 나가십니다.

겸손은 배우는 마음에서 시작됩니다. 배우려면 들어야 합니다. 한자로 듣는다는 聽은 왕이 말하는 것처럼 14번 들어야 한 사람의 마음을 얻는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듣기보다 말하기를 좋아합니다. 뭐 좀 있으면 그것을 풀어내고 싶어 안달합니다. 좀 안다 싶으면 입이 가만히 있지 않습니다. 겸손의 반대는 다른 사람의 말을 듣지 않고 자기 말만 하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자기 자신을 낮추고 하나님을 높이는 겸손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양들의 말을 귀담아 듣는 겸손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둘째는 눈물로 섬겼습니다.

바울의 3년 동안 에베소의 사역은 한 마디로 눈물의 사역이었습니다. 사도행전 20장 31절을 보겠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일깨어 내가 삼년이나 밤낮 쉬지 않고 눈물로 각 사람을 훈계하던 것을 기억하라.” 바울은 3년 동안 밤낮 쉬지 않고 눈물로 양떼들을 섬겼습니다. 바울은 양떼들을 눈물로 키웠습니다.

눈물은 불쌍히 여기는 목자의 심정에서 나옵니다. 눈물은 가슴이 뜨거운 사람에서 나옵니다. 눈물은 계모나 계부의 마음에서는 나오지 않습니다. 눈물은 삯군에게서는 나오지 않습니다. 눈물은 어머니와 아버지, 그리고 목자에게서 나옵니다. 바울은 아버지 마음으로, 어머니 마음으로, 목자의 마음으로 양들을 도왔습니다. 그랬을 때 그의 눈가에는 양떼들로 인해 눈물이 늘 고여 있었습니다. 그는 불쌍한 사람들을 보면 긍휼히 여기는 마음으로 인해 눈물이 나왔습니다. 그는 죄인들을 보면 판단하는 마음보다 눈물이 나왔습니다. 그는 회개치 않는 완악한 사람들을 보면 정죄하기보다 눈물이 나왔습니다. 바울은 복음을 미처 받아들이지 못한 사람들로 인해 눈물이 고여 있었습니다.

눈물로 키운 자식은 절대로 타락하지 않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는 부모의 마음으로, 목자의 마음으로, 눈물로 양들을 섬겨야 합니다. 우리는 머리로가 아니라 가슴으로 돕는 목자가 되어야 합니다.

셋째는 인내로 섬겼습니다.

신앙은 한 마디로 참는 것입니다. 바울은 유대인의 간계로 많은 고난을 겪었습니다. 유대인들은 가는 곳마다 바울을 죽이고자 했습니다. 사람들은 바울은 사도 자격이 없다고 비난했습니다. 바울은 동족으로부터 핍박을 받을 때마다 참기 힘들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그들을 감정적으로 대하지 않고 참았습니다.

인내란 헬라어로 휘포모네(ὐπομονἠ)로 장애물이 있더라도 낙담하거나 좌절하지 않고 참고 목적지에 이르는 것을 말합니다. 실패와 승리는 얼마나 인내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초반에 아무리 잘 뛰어도 인내심이 없어 끝까지 달리지 못하고 중도에 포기하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끝까지 인내심을 가지고 달린 사람만이 승리의 면류관을 쓸 수 있습니다. 그리고 성숙은 참는 것과 비례합니다. 어린아이들은 미성숙하기 때문에 참지 못합니다. 배고픈 것 참지 못합니다. 그러나 어른은 참습니다. 인내가 어느 정도냐에 따라서 인격이 나타납니다. 부부싸움을 할 때 누가 성숙한 사람입니까? 참는 사람이 성숙한 사람입니다.

그리고 한자로 인내의 인((忍)은 가슴에 칼을 얹고 누워있다는 뜻입니다. 이런 처지에 있는데 누가 와서 건드린다고 신경질부리고 혈기부리고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면 가슴 위에 놓인 칼에 찔리게 됩니다. 다시 말해 상하는 것은 본인 자신입니다. 그래서 화나는 일이 생겨도, 감정이 북받쳐도 참아야 합니다. 피해는 참지 못하는 이에게 가해집니다. 그리고 인(忍)자에는 마음속에 죽순처럼 솟아오르는 미움, 증오, 분노, 탐욕들을 마음속의 칼로 잘라 버리라는 뜻이 있습니다.

인내는 고난의 결정체입니다. 인내는 역경을 이길 수 있는 내적인 힘입니다. 인내는 마치 용광로에서 금광석을 제련하여 정금을 얻어내는 것과 같습니다. 로마서 5장 3-4절에서 바울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다는 소망을 이루는 줄로 안다고 했습니다. 인내를 통해 아름다운 품성(character)이 조각됩니다.

예수님의 생애는 인내입니다.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히 12:2). 예수님은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의 고난을 참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인내로 세상 영광을 버리고 십자가의 길을 택하셨습니다. 십자가의 길은 험난했습니다. 십자가는 인간쓰레기 같은 사람들이 지는 형벌입니다.

예수님은 나의 죄를 대신하여 이 형틀을 지셨습니다. 이 형틀에서 많은 수모를 당했습니다. 조롱을 받으셨습니다. 십자가는 고난이요 멸시요 비방의 표적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끝까지 참으셨습니다. 나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서 참으신 주님을 생각할 때 양들을 인내로 섬길 수 있습니다.

셋째, 바울의 메시지(행 20:20-21)

바울은 담대하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유익한 것은 무엇이든지 공중 앞에서나 각 집에서나 거리낌이 없이 여러분에게 전하여 가르치고”(행 20:20). 바울은 자신이 유익을 조금도 구하지 않고 복음을 전했습니다. 바울은 사람들의 눈치를 보지 않고 공중 앞에서나 각 집에서나 복음을 전하고 가르쳤습니다. 그가 전한 내용이 무엇입니까?

첫째는 하나님께 대한 회개입니다.

사도행전 20장 21절을 보겠습니다. “유대인과 헬라인들에게 하나님께 대한 회개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을 증언한 것이라.” 유대인과 헬라인은 당시 모든 사람을 의미합니다. 바울은 누구에게든지 먼저 하나님께 대한 회개를 가르쳤습니다. ‘회개’란 방향, 삶의 목적, 가치관을 바꾸는 것을 말합니다. 지금까지 나를 중심으로 한 삶에서 하나님을 중심으로 방향을 바꾸는 것입니다. 회개하기 위해서는 죄를 미워하고 죄를 뉘우치고 죄를 고백해야 합니다.

우리는 인간성이 좋은 사람을 볼 때 회개할 필요가 없는 것 같이 느껴집니다. 그러나 세상에 문제없는 사람은 한 명도 없습니다. 겉으로 보면 아무 문제없는 선돌이와 착순인 것 같지만 다 문제가 있습니다. 하늘 아래 사는 사람들은 누구를 막론하고 하나님 앞에서 모두 죄인입니다. 성경은 선포합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롬 3:10).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롬 3:23). 인간은 모두 하나님 앞에서 죄인입니다. 사람 앞에서는 의로울지 모르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모두가 죄인입니다.

죄의 삯은 죽음입니다(롬 6:23). 죽은 후에는 심판이 있습니다(히 9:27). 이 심판은 무서운 불 심판이 기다리고 있습니다(계 21:8). 우리는 이 땅에서 길어야 100년 살지만 하나님의 심판은 영원합니다. 그곳은 구더기도 죽지 않습니다(막9:48).

둘째로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입니다.

우리는 태어날 때부터 아담의 죄성을 가지고 태어납니다. 따라서 인간은 본질상 죄와 허물로 죽었습니다(엡 2:1). 아담의 죄성은 하나님 중심이 아니라 자기중심입니다. 자기가 왕입니다. 자기 기준으로 모든 것을 바라보고 모든 것을 판단합니다. 자기 외에 다른 사람을 사랑하지 못합니다. 자기중심을 절대로 포기하지 않습니다. 자기에 대한 집착이 강합니다. 죄는 살아있는 매개체를 통해 역사합니다. 우리는 살아있는 한 죄의 지배에서 벗어날 수 없고 죽음으로부터 해방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인간을 불쌍히 여기시고 인간의 죄를 대신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이셨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이 내 대신 십자가에 죽으셨음을 믿는 순간 구원을 받습니다. 이 구원 받은 생명은 믿음이 크든 작든, 그리고 행위에 따라 절대로 취소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큰 믿음을 강조하는 이단은 나의 행위에 따라, 믿음이 크고 작음에 따라 구원이 취소된다고 주장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믿음을 통한 구원은 절대로 취소되지 않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습니까? 우리는 아직 죽은 일도 없습니다. 우리는 부활한 일도 없습니다. 승천한 일도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은 일도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의 죄를 위해 죽으시고 무덤에 묻혀 장사지낸바 되었다가 부활하시고 승천하시고 하나님 보좌에 앉으셨습니다. 이것은 예수님만이 경험하신 역사적인 사실입니다.

우리가 역사적인 사실을 믿는 순간 그리스도와 연합하게 됩니다. 이로 인해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실 때 나도 죽었고, 예수 그리스도가 땅에 묻히실 때 나도 묻히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실 때 나도 부활하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승천하실 때 나도 승천하고, 하늘의 우편에 계실 때 나도 우편에 앉았습니다(엡 2:6). 우리는 장차 하나님 나라에 갈 것이 아니라 이미 가 있습니다. 이 생명은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 함께 재림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 우리 육신이 새로운 몸으로 부활합니다. 이 새로운 몸과 생명이 만나는데 이것이 영화로운 영광입니다.

구원 받은 우리는 성화를 해야 합니다. 어떤 이단은 성화를 강조하지 않습니다. 한번 구원 받으면 아무렇게 살아도 된다고 합니다. 성화는 내 육신이 죽을 때까지 해야 합니다.죄는 내 육체가 살아있는 한 계속 역사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날마다 십자가 앞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우리 몸은 성령이 거하시는 성전이기 때문에 성결해야 합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머리로 믿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예수님을 믿고 입으로 예수님을 나의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하나님께 대한 회개와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을 동시에 전했습니다. 회개 없는 믿음은 자기 의를 주장하게 됩니다. 한편 믿음 없는 회개는 죄의식에 시달리며 자기 불의를 주장하게 됩니다. 따라서 하나님께 대한 회개와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을 동시에 전해야 합니다. 예수님도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하셨습니다(막 1:15).

넷째, 바울의 사명인의 자세(행 20:22-25)

바울의 사명에 대한 자세가 어떠합니까? 바울은 심령에 매임을 받아 예루살렘으로 갑니다. 그곳에는 결박과 환난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성령의 증거를 통해 잘 알고 있었습니다(행 20:22-23). 그러나 사명에 대한 그의 자세는 조금도 흐트러지지 않았습니다.

사도행전 20장 24절을 보겠습니다.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이 말씀은 바울의 사명 선언문입니다.

세상에 아무리 귀한 것이 많다 하지만 목숨을 잃으면 이런 것들은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아무 유익이 없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사람이 무엇을 주고도 제 목숨을 바꿀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막 8:26-27). 사람에게 목숨보다 더 귀한 것은 없습니다. 그러나 바울에게 목숨보다 더 귀한 것이 이었습니다. 그것은 사명이었습니다. 그의 사명은 이방인들에게 은혜의 복음 증언하는 일이었습니다. 이 사명은 예수께로부터 받았습니다. 그는 이 사명을 세상의 어느 것보다 귀하게 여겼습니다. 바울은 사명을 위해 자신의 생명 바칠 각오가 되어 있었습니다.

우리가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할 것인가는 매우 중요합니다. 그런데 요즘 사람들이 무엇을 위해 살 것인가 하는 목적, 사명이 없는 맹목적입니다. 그리고 먹고 사는 문제에 얽매여 의미 없이 살아갑니다. 그러나 목적이 없는 삶, 사명이 없는 삶은 동물과 다를 바 없습니다.

또 사명에도 여러 가지 사명이 있습니다. 그러나 세상에서 가장 가치 있는 사명이 무엇입니까? 여러분의 사명 선언문은 무엇입니까? 사람들이 목숨을 두려워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자기 목숨보다 더 크고 귀한 사명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셨습니다. 이 생명은 누구도 뺏어갈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의 복음을 맡겨주셨습니다. 하나님이 맡겨주신 생명의 복음을 충성스럽게 감당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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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용할 양식

예배 안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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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주일 오후 예배 - 오후 3:30
  • 어린이 예배 - 오전 11:00

대학마을교회 개척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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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식과감성,2016)

                      행복과 긍정심리
                      (시그마 프레스,2015)

                        성심리
                        (시그마 프레스,2015)

                          마가복음에서 만난 예수님
                          (킹덤북스,2014)

                            사도행전에서 만난 복음
                            (생명의말씀사,2013)

                              로마서에서 만난 복음
                              (생명의말씀사,2012)

                                창세기에서 만난 복음
                                (생명의말씀사,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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