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5:9-12

의를 위해 박해를 받는 자는 복이 있나니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는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마 5:10).

세상에는 두 종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하나는 분쟁하게 하는 trouble maker와 다른 하나는 화평하게 하는 peace maker입니다. 그리고 세상에는 고난을 받을 때 두 종류의 사람으로 나누어집니다. 하나는 고난을 당할 때 원망하고 불평하는 사람입니다. 다른 하나는 신앙적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은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다고 했습니다. 그런 사람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의를 위해 박해를 받는 자는 천국이 그들의 것이요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크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종류의 사람입니까? 화평을 깨는 trouble maker입니까? 아니면 화평하게 하는 peace maker입니까? 그리고 박해를 불신앙으로 받아들입니까? 아니면 신앙적으로 받아들입니까? 우리가 화평을 만들어가는 peace maker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우리가 박해를 받을 때 기뻐하고 즐거워하여 천국을 소유하기를 기도합니다.

1.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습니다(마 5:9). 

예수님은 화평이십니다.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엡 2:14). 
당시 성전에는 이방인 뜰과 성전 뜰 사이에 담이 있었습니다. 이방인들은 성전 뜰에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한편 백성들은 성전 뜰과 성소 사이에 담이 있어 성소를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제사장들은 성소와 지성소 사이에 담이 있어서 대제사장 외에는 지성소에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담이 있으면 소통이 안 됩니다. 소통이 안되면 오해가 생기게 됩니다. 그리고 공유할 수 없게 됩니다. 공유하지 못하면 되면 뒤에 수군거리고 비방하게 됩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로 모든 담을 소멸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지성소와 성소 사이를 가로막는 휘장을 찢으셨습니다. 이로 인해 사람은 언제든지 하나님께로 나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사람과 사람 사이의 모든 담이 헐려 소통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화평이십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화평의 십자가입니다. 

그런데 세상에는 불화가 끊이질 않습니다. 세상에 가장 무서운 것이 있다면 그것은 전쟁일 것입니다. 지난 금요일에 휴가 온 요한이를 귀대시켜주고 오는 길에 임진각을 들렸습니다. 그곳에는 한국 6.25 동란으로 인한 전쟁의 상흔을 조각과 시, 그리고 가요 등으로 표현해 놓았습니다. 지옥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전쟁이 지옥이었습니다. 

불화는 국가와 국가 사이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불화는 우리가 살고 있는 곳곳에 있습니다. 우리의 삶의 현장인 직장과 가정, 심지어 교회 안에도 불화가 있습니다. 기성세대와 신세대간에 불화가 있습니다. 노동자와 사용자의 불화가 있습니다. 

심지어 부모와 자녀 사이에도 불화가 있습니다. 그래서 자녀들이 아버지 어머니 전화번호를 저장할 때에 엄마를 짜증1, 아버지를 짜증2, 심지어 괴물, 웬수로 입력을 한다고도 합니다. 이런 불화는 국가 간에 일어나는 전쟁 못지않게 우리를 불행하게 만들고 고통스럽게 합니다. 그러나 천국의 특징은 전쟁과 불화가 없습니다. 천국에는 갈등과 다툼이 없습니다. 천국에는 오직 평화만이 있습니다. 평화가 있는 곳이 바로 천국입니다. 이런 소중한 화평은 그냥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만들어 가야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분을 주셨기 때문입니다(고후 5:18-19).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화평하게 하는 자은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마 5:9). 그렇다면 화평을 깨는 사람은 마귀의 자식이라고 일컬음을 받게 됩니다. 성 프랜시스의 유명한 기도가 있습니다. “주여 나를 평화의 도구로 써주소서.” 우리는 평화를 만드는 도구가 되기 위하여 어떤 삶을 살아야 합니까? 

첫째, 그의 의를 먼저 구하는 곳에 화평이 있다.

예수님은 무엇을 먹을까 입을까 염려하기 전에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는 사람이 되라고 하셨습니다(마 6:33). 사람이 무엇을 먹을까 입을까 염려하는 하는 곳에 불화가 있습니다. 반면에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는 곳에 평화가 있습니다. 

왜 사람들이 치고받고 싸웁니까? 왜 나라와 나라가 서로 싸웁니까? 왜 노사간의 갈등이 있습니까? 사람들이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기 위해서입니까? 자기 밥그릇과 자기 자리를 챙기고 지키기 위함이 아닙니까? 

6.25 동란이 일어난 근원적인 원인은 강대국들의 패권 다툼에 의해서입니다. 강대국의 패권다툼으로 38선이 그어진 데서부터 출발합니다. 우리나라는 강대국의 패권 다툼으로 인해 1945년 8월 15일에 해방되고도 대한민국이라는 문패를 달지 못하다가 해방 된지 3년이 지나 1948년 8월 15일에 대한민국이라는 문패를 달 수 있었습니다. 문패를 단지 2년이 채 못 되어 3년간 동족끼리 서로 총부리를 겨눠야 했습니다. 

화평은 저절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화평은 적극적으로 의를 구할 때 이루어집니다. 지금 남북이 경색되어 있습니다. 크리스천들이 적극적으로 의를 구하여 화평을 만들어내야 합니다. 성경은 인애와 진리가 같이 만나고, 의와 화평이 입을 맞추었다고 했습니다(시 85:10). 의가 화평을 만듭니다. 

둘째, 겸손한 곳에 화평이 있다. 

겸손의 반대는 교만입니다. 교만한 사람은 남을 깔보고, 남을 업신여기고, 무시하고, 다른 사람의 의견을 경청하지 않습니다. 자기 유익만을 추구하고, 양보나 희생이란 단어가 없습니다. 반면에 겸손은 상대방에 대한 존중심이 바탕에 깔려 있습니다. 겸손한 사람은 자기 자신보다 다른 사람을 우선 생각하고, 다른 사람을 높이고 배려합니다. 겸손한 사람은 자기를 자랑하지 않으며, 다른 사람을 돋보이게 합니다. 그리고 예의범절로 대합니다. 예의범절이란 말과 행동으로 상대방을 높이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겸손하십니다. 예수님은 겸손하여 낮고 천한 사람을 귀히 여기셨습니다. 예수님은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마 11:29)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겸손하신 예수님을 배울 때 겸손한 사람이 됩니다. 우리가 겸손할 사람이 될 때 우리의 삶의 현장에 진정한 평화가 임하게 됩니다. 

셋째, 다른 사람을 위해 복을 빌고 감사하는 곳에 화평이 있다. 

우리 마음이 시끄러울 때가 언제입니까? 남이 나보다 잘 될 때가 아닙니까? 인간의 본성은 남이 잘 되는 것을 눈뜨고 봐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고 하는 말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으려면 남이 잘 되는 것을 기뻐하고 남이 잘 되도록 복을 빌어야 합니다. 

남을 위해 복을 빌 때 은혜를 받은 것에 대한 감사함이 생깁니다. 사람이 은혜를 받았을 때 세 종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하나는 은혜를 은혜로 알고 감사하는 사람입니다. 다른 하나는 은혜를 아주 당연한 것으로 여기는 사람입니다. 또 다른 하나는 은혜를 입고도 원망과 불평을 하는 등 은혜를 원수로 갚는 사람입니다. 은혜에 대해 감사할 때 평강이 있고 그런 사람이 모인 곳에 화평이 있습니다.

넷째, 용기가 있는 곳에 화평이 있다. 

불의에 동조하고 침묵하는 사람은 평화를 만들어 낼 수 없습니다. 불의에 항거하는 정신이 없이는 평화를 얻을 수 없습니다. 화평에는 참 화평과 거짓 화평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거짓 화평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마 10:34). 여기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신 화평은 참 화평이 아니라 불의와 타협해서 얻는 거짓 화평입니다. 사람들은 검을 무조건 불화로 이해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참 화평은 불의와 타협하지 않고 검을 통해서만 얻을 수 있습니다. 민주주의는 피를 먹고 자란다는 말이 있습니다. 불의와 타협할 때 그 화평은 거짓 화평입니다. 

우리는 불의와 복음의 원수들인 이단과 싸울 수 있는 용기가 있어야 합니다. 저는 지난 번 이단과 기도와 말씀의 검으로 결연하게 싸우는 목자들의 용기를 보았습니다. 그런 용기를 통해 인하대 CMI를 지켜낼 수 있었습니다. 

다섯째, 용서와 회개가 있는 곳에 화평이 있다. 

사람은 누구를 막론하고 불완전한 사람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실수와 잘못이 있게 마련입니다. 세상에 실수와 잘못이 없는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습니다. 남의 실수와 잘못을 용서하고 덮어 줄 때 화평이 있습니다. 그런데 세상은 남의 실수와 허물을 기회의 발판으로 삼으려고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은 평화의 사람이 될 수 없습니다. 

우리는 더 나아가 자기의 죄를 회개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남의 실수와 허물을 보면서 자기를 돌아보고 자기의 허물과 죄를 회개해야 합니다. 용서와 회개가 있는 곳에 평화가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어떠한 사람으로 살아왔습니까? 여러분의 가정과 직장 그리고 캠퍼스와 교회에서 peace maker로 살아왔습니까? 아니면 trouble maker로 살아왔습니까? 우리가 peace maker가 되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기를 기도합니다.

2. 의를 위해 핍박을 받는 자는 복이 있다(마 5:10-12). 

초대교회 신자들은 상상할 수 없는 고통을 받았습니다. 사자굴에 던져지고, 역청에 말려 산채로 불태워 죽임을 당하기도 했습니다. 야생동물 가죽옷에 입혀 사냥개들에 물려 죽임을 당하기도 했습니다. 이와 같은 고통 속에서도 초대 교회신자들은 믿음의 중심을 지켰습니다. 이들의 믿음의 중심으로 복음이 세상에 전해질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현실이 어떠합니까? 우리 선배들의 믿음의 중심이 점점 상실되어 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인구의 4분의 1이 크리스천이면서도 온갖 범죄, 부정, 부패, 비행이 줄지 않고 있습니다. 이상득 전 의원은 소망교회 장로입니다. 그가 뇌물로 교도소에 들어가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이는 크리스천으로서 의를 위해 핍박받기보다 불의와 적당히 타협하며 살았기 때문입니다. 

지난 토요일 국민일보에 불편한 진실 '술마시는 크리스천'이라는 기사가 나왔습니다. 장로와 집사들 중에는 회사 업무상 어쩔 수 없이 술을 마신다는 것입니다. 크리스천들 중에 세상과 적당히 타협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마 5:10). ‘의’는 예수님을 말합니다. 이런 이에게 임하는 복은 심령이 가난한 자가 누리는 복과 같습니다. 

예수님은 계속하여 말씀하십니다.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이같이 박해하였느니라”(마 5:11-12). 예수님을 위해 박해를 받을 때 기뻐하고 즐거워하라고 하십니다. 왜냐하면 하늘의 상이 크기 때문입니다. 

‘기뻐하라’는 말은 무엇에 대해 반가워한다, 어떤 일을 기쁘게 맞이한다는 뜻입니다. ‘즐거워한다’는 말은 행복하게 여기고 그것에 마음을 둔다는 뜻입니다. ‘기뻐한다’는 말은 수동적이고, ‘즐거워한다’는 말은 적극적이고 능동적입니다. 

탈무드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지혜로운 사람은 모든 것을 통해서 배우는 사람이요, 세상에서 가장 강한 사람은 자기 자신을 이기는 사람이요, 세상에서 가장 부한 사람은 자기가 가진 것을 가장 만족하게 여기고 기뻐하는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기쁨은 상대적인 것이 아닙니다. 기쁨은 절대적인 것입니다. 부하다고 기쁘고 가난하다고 기쁘지 않은 것이 아닙니다. 기쁨은 환경과 관계가 없습니다. 

“하늘의 상이 큼이니라.” 하늘의 상이 없는 사람은 가장 불행합니다. 하늘의 상을 보장을 받고 오늘을 사는 사람은 복된 사람입니다. 영원한 약속이 보장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돌에 맞아 죽는 스데반은 천사의 얼굴과 같았습니다. 

바울은 디모데후서 4장을 보면 바울은 달려갈 길은 다 가고 믿음을 지켰으니 내 앞에 생명의 면류관이 있다고 했습니다. 그는 생명의 면류관을 바라봤을 때 감옥에서 기뻐할 수 있었습니다. 사도들은 복음을 전하다가 옥에 갇혔다가 출옥했습니다. 그때 그들의 모습이 어떠했습니까? 사도행전 5장 41절을 보면 그들은 그 이름을 위하여 능욕 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기뻐하면서 공회 앞을 떠났습니다. 

베드로는 고난의 의미를 깨닫고 이렇게 권면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연단하려고 오는 불 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 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 오히려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벧전 4:12-13).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진실하게 살고자 하면 반드시 박해를 받습니다. 이 때 우리는 마음에 상처를 받고 슬퍼 눈물을 흘립니다. 그러나 핍박을 통해 불순물이 제거되고 정금과 같은 믿음이 생깁니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핍박을 받으리라”(딤후 3:12).

하나님이 사용하시는 방법 중의 하나가 고난입니다. 고난은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따라서 두 가지 역할을 합니다. 고난을 불신앙적으로 받아들이면 인생이 사정없이 망가집니다. 고난을 당할 때 원망과 불평을 늘어놓고 남의 탓으로 돌리고 절망이나 하면 인생이 망가집니다. 반대로 고난을 신앙적으로 받아들이면 그 고난은 복이 됩니다. 

욥은 고난을 받으면서 모든 인생의 불순물, 찌꺼기를 제거하고 하나님만 바라보는 순전한 마음을 얻었습니다. 욥의 고난 중의 고백을 한번 들어보겠습니다. “그러나 내가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순금 같이 되어 나오리라”(욥 23:10). 대장간에서 철을 풍로에 넣어 달구었다가 물에 식혔다가 하는 것을 단련이라고 하지요. 이렇게 단련을 많이 하면 불순물, 찌꺼기가 다 제거됩니다. 순전하게 됩니다. 욥은 그 모든 시련이 끝난 후에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욥 42:5). 시련과 고난을 통하여 순전한 마음이 되니 하나님을 뵙게 되더라는 것입니다. 순전한 마음이 되면 하나님을 보게 됩니다.

악성 베토벤이 서른두 살에 슬픈 편지 한 장을 썼습니다. 그것은 미리 써 놓은 유서였습니다. 그는 서두를 이렇게 써내려갑니다. “나는 6년 동안 나아질 것이라는 희망 속에 살았다. 그런데 나는 하루하루 절망의 연속이었다. 나는 귀머거리가 되었다. 잠시 후면 나의 삶을 마감하게 될 것이다. 불우한 존재여” 음악가가 귀머거리여서 자기가 작곡한 노래 소리를 들을 수 없다면 이보다 더 절망적이고 답답한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이보다 더 불행한 인생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러나 그는 눈물로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 나서 다시 이렇게 써내려갑니다. “하나님, 불우한 인생을 마치기 전에 온전한 기쁨을 허락하여 주옵소서. 단 하루만이라도 기쁨을 만끽하게 하여주시옵소서. 내가 작곡한 이 음악을 단 하루만이라도 깨끗한 귀로 들을 수 있게 하소서.” 이것이 바로 그의 소원이었습니다. 

그 후 그는 24년 동안 귀머거리로 살면서 작곡 활동을 계속하다가 마지막으로 교향곡 제 9번 쉴러의 “기쁨의 송시”에 작곡하였습니다. 그리고 이 교향곡 9번이 초연되었을 때 많은 사람들이 기립박수를, 아우성과 환호로 박수칠 때, 그는 뒷전에 앉아 악보를 넘기며 빙그레 웃고 있었습니다. 그에게는 환호성도 노래 소리도 들리지 않았습니다. 그는 혼자서 악보를 넘기며 마음에서 하늘의 노래를 들었습니다. 내면에서 오는 기쁨, 신비로운 나만의 것이었습니다. 

강철 왕 카네기는 ‘당신을 성공으로 이끈 자원이 무엇입니까?’라고 물었습니다. 카네기는 대답했습니다. “첫째는 가난이요, 둘째는 무식이고, 셋째는 기도입니다.” 카네기의 어린 시절은 얼마나 가난했든지 교복이 한 벌밖에 없어서 학교에 갔다 오면 빨아서 다리미로 말려서 입어야 했습니다. 카네기의 어릴 때 소원이 ‘하나님, 제가 돈을 벌어 어머니께 새 드레스를 선물할 수 있도록 해주세요’ 이었습니다. 카네기는 고난을 성공의 삶을 사는 자원으로 받아들였습니다. 가난했기에 더 부지런했고, 무식했기에 더 겸손해졌고, 더 책과 가까이 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의 삶의 수준은 높습니다. 너무 수준이 높기 때문에 포기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결코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천국 시민으로서 마땅히 이런 자가 되어야 합니다. 또 우리는 성령의 도우심으로 이렇게 될 수 있습니다. 8복은 예수님의 모습입니다. 신앙생활이란 외적인 활동이 아니라 예수님을 배우는 삶입니다. 우리는 마음이 가난해야 하고, 함께 슬퍼해야 하고, 온유해야 하며, 화평을 만들어야 하고, 의를 위해 핍박받을 수 있는 신자로 거듭 나야 합니다. 그때 비로소 잘못된 현실을 변혁시켜 마침내 하나님나라를 이 땅에 펼쳐 보일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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